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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앤느 Dec 04. 2020

집으로 돌아가는 길

늘 그 자리에 있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

어릴 적 우리 동네 건널목 어귀에는 아주 오래된 약국이 하나 있었다. 군위 약국. 군위에 사는 것도 아닌데 왜 하필 이름이 군위인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내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한 가지는 군위 약국은 늘 그 자리에 있다는 것. 그러니 어디에서 길을 잃어버리더라도 택시를 타고 ‘군위 약국이요’라고 한 마디만 하면 언제고 집에 돌아올 수 있다는 것.


실로 그랬다. 엄마는 어린 나를 데리고 택시를 탈 때면 언제고 동네 이름이나 주소 같은 복잡한 것 대신 “군위 약국이요”라고 한마디만을 했다. 그러고 나면 몇 분 후에 신기할 정도로 택시 아저씨들은 우리 집 골목 앞 그 오래된 약국 앞에 차를 세우곤 했다. 이제 막 초등학교를 들어갈 무렵의 나는 그게 참 신기했다. 집을 찾아가는 마법의 주문이라도 알아낸 것 마냥 왠지 마음이 든든했다. 길을 잃어버려도 누군가 "집이 어디니?"라고 물으면 "군위 약국이요" 하고 대답하면 쉬이 찾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니 조금도 복잡할 것이 없을 터였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아빠 차를 타고 어딜 다녀오다가도,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다가도 군위 약국 간판만 보이면 집에 왔다는 그 안도감이 가슴에 가득 차올랐다. 정작 집 대문을 마주하기도 전에, 약국 간판이 내 마음을 따스하게 했다.


어느새 자라서 택시를 혼자서도 탈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땐 나도 엄마처럼 “군위 약국이요”라고 말하곤 했다. 버스를 타고 군위 약국 앞을 지나 스무 걸음 이상 떨어져 있는 버스정류장에서 내릴 때면,  굳이 멀리 불이 환히 켜져 있는 약국을 간판을 바라보곤 했다. 그러면 긴 하루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곳에 돌아온 느낌이 들다. 왠지 환영받는 느낌이 들었다. “잘 왔어.” 혹은 “수고했어”, 그것도 아니면 “오늘도 고생 많았어.” 불 켜진 약국이 이런 따뜻한 말을 내게 건네주는 듯했다. 아마도 그래서였던 것 같다. 그 앞을 지날 때면 연로하신 약사 할아버지가 오래오래 건강하시길, 더 오랫동안 이 동네 어귀를 지켜주길 바랐던 건.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그 동네를 떠났다. 더는 하루를 마치고 그 동네를 향해 돌아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 내 인생의 대부분을 머물렀던 집과 동네를 떠나면서 느끼는 허전함은 말로 다 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엄마 아빠의 흔적을 매일 마주하는 일이 떠나는 것보다 더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더 이상 “군위 약국이요”라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불이 환히 켜진 약국 앞을 지나는 일상이 사라졌다. 그리고 남몰래 홀로 받던 위로의 한 조각도 사라졌다. 그 또한 또 하나의 상실이었다.



그러나 가끔 그 동네에 여전히 살고 계시는 외할머니를 뵈러 갈 때면, 버스에서 내려서 일부러 군위 약국 앞까지 걸어 올라갔다. 지름길을 두고도 굳이 그 건널목까지 올라가 불 켜진 약국 간판을 보며 그 앞에 서서 신호등 불이 바뀌길 기다려본다.

"여전하구나..."  혼잣말을 읊조리며 한참 바라다본다. 그리곤 세상 모든 것이 다 변하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 주는 위로를 잠시나마 누려본다.


그렇게 잘 알지도 못하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군위 약국은 내게 따스한 추억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인생은 참 모를 일이다.

늘 그 자리를 지켜주는 군위 약국이 좋다 하면서,  그 마을을 떠나고, 그 도시를 떠나고, 그 나라를 떠나서... 지구 반대편에 서서 그 추억을 떠올리며 살고 있으니. 변치 않는 그것을 그리워하며  끝도 없이 변하는 세상 속에 적응해 살아가는 내 모습이 짠하기도 하다.

 

그러다 문득 살아있는 날 동안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주고 싶다는 생각도 해 본다.

그저 불을 켜 두고 그 자리를 지킬 뿐이지만 그러나 그 존재만으로도 누군가에겐 위로가 되는 특별할 게 하나 없는 길모퉁이 작은 약국 같은 사람.


특별할 게 하나도 없는 내가, 특별할 게 하나도 없는 인생을 살면서도, 살아가는 동안 누군가에게만큼은 늘 그 자리에 있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존재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따스하게 불을 밝히고 그 자리를 지키며 기다려주는, 그래서 언제라도 길을 잃었을 때라도 쉬이 찾아들 수 있는 그런 존재.



적어도 내 품에 안긴 두 아이에게만큼은 그런 엄마가 되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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