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욕조에서 물을 받아 한참을 놀고 나오더니 자기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한다.
“엄마 내 손이 쪼글쪼글 김천할머니 손이 됐어.”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하는 아이를 바라보며 웃음이 팡 터졌다.
맞다. 정말로 맞다. 아이들이 살면서 본 가장 쪼글쪼글 주름이 많은 손은, 내 할머니인 김천할머니의 손이었다. 이제 여든도 훌쩍 넘기신 할머니는 얼굴도 쪼글쪼글 손도 쪼글쪼글 주름이 졌다. 할머니의 얼굴 주름은 여섯 자식 건사하며 살아온 인생의 희로애락을 담아내고 있고, 손 주름은 감내하며 걸어온 고생스러웠던 인생의 여정을 담아내고 있는 듯하다.
내가 사랑하는 우리 할머니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을 겪으셨다고 한다. 뭔가를 배워보기도 전에, 피난을 떠나야 했던 할머니는 그 이후로 학교의 문턱을 넘어보지 못했다. 그래도 애지중지 큰 막내딸이라 그런지 시집은 그럭저럭 잘 가셨는데, 할아버지가 초등학교 교사라 “문선생님 사모님” 소리를 들으시며 사셨다. 학교에서 제대로 된 배움을 누려본 적 없어서 평생 그게 한이셨던 할머니로서는 그것이 큰 자랑이셨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자랑스러움도 그리 오래 누리지는 못하셨다.
할아버지께서 폐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셨다. 내가 5살 무렵의 일이었다. 슬하의 여섯 자녀들 중에 출가한 자식은 둘 뿐. 결혼은 고사하고 아직 대학도 못 간 자녀들도 있었다. 할머니의 파란만장한 인생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할아버지의 사모님으로 그나마 가정만 건사하면 됐던 할머니는 취업 전선에 뛰어드셨다. 물론 그리 번듯한 직업은 아니셨다. 그러나 늘 줄기차게 어딘가에서 무엇인가가 되어 열심히 살고 계셨다.
어느 여름 방학 때 할머니 댁을 가면, 할머니는 수영장 매점의 아주머니가 되어 간식을 팔고 계셨다. 덕분에 나는 수영을 하지 않는데도 수영장 매점에 앉아 매점 아줌마 곁을 지키며 배 부르도록 간식을 먹는 호사를 누렸다. 그런가 하면 어느 해에는 결혼식 피로연장에서 일을 하시고는 뷔페 음식을 잔뜩 싸다 주시기도 했다. 어느 해에는 골프장에서 청소하는 일을, 또 어느 해에는 어린이집 밥 선생님으로, 농번기에는 일손이 필요한 농장을 도우러... 내 기억 속에 할머니는 늘 무언가 다른 일을, 늘 변함없이 열심히 하고 계셨다. 그렇게 할머니의 변신은 끝이 없었다.
연세가 더 드시고는 봄이면 이 산, 저 산을 훌쩍훌쩍 넘어 다니시며 고사리를 꺾으셨는데, 그렇게 봄 동안 꺾은 고사리를 깨끗이 씻어 말려서 귀한 사람들에게 선물하거나 때로는 사겠다고 줄을 서는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팔기도 하셨다. 그런가 하면 가을에는 여기저기 메뚜기를 잡으러 뛰어다니셨다. 내 귀여운 아들이 ‘메뚜기의 천적은 바로 김천할머니’ 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렇게 할머니는 늘 부지런히 움직여 무언가를 하셨고, 할머니의 그 수고 덕에 셋째 삼촌부터 당시 막 고등학교에 들어갔던 막내 삼촌까지 모두가 결혼을 하고 자기 자리를 잡아 삶을 잘 살아가고 있다.
내 기억 속 할머니는 참 씩씩하셨다. 한 번도, 할아버지가 없어 내가 이래 힘들다 하신 적이 없었다. 슈퍼맨처럼 늘 무엇이든 잘 해내셨고, 씩씩하셨다. 그렇게 씩씩하게 꼿꼿하게 견디시던 할머니는, 사랑해 마지않던 큰 며느리와 큰 아들(우리 엄마와 아빠)을 연달아 떠나보내시고는 한 동안 세상 가장 허망한 표정을 지으며 멍하니 앉아 계시곤 하셨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할머니는 다시 씩씩해지셨다. 여섯 자식을 다 독립시키고 이제 훌훌 털어버리나 했더니, 뒤늦게 혼자가 된 손녀가 눈에 밟히셨던 모양이다. 할머니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그렇게 말씀하시곤 하셨다.
“니는 내 딸이다... 내가 니를 키아야지... 내가 니 부모 앱잽인데.. ”
그렇게 할머니는 또 한 번 무엇이든 돼야 했다. 여섯 자식을 키우느라 되는 대로 무엇이라도 돼야 하면 되고, 해야 하면 하고 그렇게 살아온 인생이었다. 이제는 좀 쉬려나 했더니 다시 찾아온 업둥이다. 그러나 내가 키워야 한다는 그 책임감이 다시 한번 할머니를 일으켜 세웠다. 그렇게 할머니는 나를 늦둥이 자식처럼 애지중지 키워주셨다.
결혼을 하던 날, 할머니는 예식장에 도착하기도 전부터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고 또 흘리셨다고 한다. 손수건으로 눈을 문지르고 또 문질러 눈 주변이 다 벌겋게 짓무를 지경이었다. 우시면서도 웃으셨고, 좋아하시면서도 아파하셨다.
무엇이라도 돼야 했던 할머니의 인생과 그게 무엇이라도 견딜 터이니 제발 잘만 자라주길, 잘만 살아주길 바랬던 어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독 그러지 못했던 큰 아들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과 회한이... 그리고 아픈 손가락 같았던 손녀딸이 그래도 이렇게 잘 자라서 자신의 인생으로 걸어간다는 사실에 대한 후련함과 기쁨 다 뒤섞여 있었으리라.
내가 결혼한 이후에 할머니는 훌쩍 늙으셨다. 불과 몇 달 사이에 몇 년을 훌쩍 뛰어넘은 듯 더욱 쪼글쪼글해지셨다.
더는 무엇이 되지 않아도 되어서 일까? 여섯 자식에다 업둥이 나까지, 홀로 짊어져야 했던 미션을 모두 완성한 할머니는 그렇게 눈물이 많고 걱정이 많은 노인이 되었다.
전화를 드릴 때마다 숨죽여 눈물 흘리시는 할머니의 음성을 들으면서, 나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될 수 있었던, 그 씩씩했던 할머니를 기억 속에서 더듬어 찾아본다. 눈물 없이 지나올 수 없었던 그 세월을 홀로 씩씩하게 견디느라 할머니의 주름이 더 깊어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그런 할머니가, 쪼글쪼글 주름진 할머니가, 시도 때도 우시는 할머니가, 짠하고도 사랑스럽다.
멀리 있어, 할머니의 눈물 닦아드리지 못하지만, 그래도 잘 살아보려 한다.
나를 위해 무엇이라도 될 수 있었던 할머니의 작은 바람 이루어드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