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이다.
색동저고리까지는 아니더라도 고운 옷 차려입고, 진수성찬까지는 아니더라도 풍성하게 준비한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가족의 정을 나누는 날. 어릴 적엔 누구의 집을 찾아가든, 누가 집으로 찾아오든, 어느 편에 있든 설레고 설레던 날이었다.
할머니 댁을 찾아가는 길에 고작 1시간 걸리는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휴게소를 들러 아빠 비상금으로 함께 사 먹었던 라면의 기억도, 세배를 하면 쥐어주시는 세뱃돈에 주머니가 두둑해져 마음도 함께 두둑해졌던 기억도, 전을 부치는 할머니 곁에 입을 아 벌리고는 막 구운 동그랑땡을 넙죽넙죽 받아먹던 기억도 모두 따스한 명절의 기억이었다.
그러나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니, 그 따스한 명절이 가장 추운 날이 되고 말았다.
모두가 발길을 돌려 자신의 근원을 찾아 떠나는 귀향길 행렬을 바라보며, 늘 그렇듯 김천 할머니 댁을 향하는 열차에 몸을 싣고도 내 영혼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한도 끝도 없이 방황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김천역에 내려 할머니 댁을 향해 걸으면서 나는 참 의아했다. 셋이서 걷던 이 길을 둘이서 걷다가 이제는 홀로 걷고 있는 이 현실이. 내 곁에 함께 걷던 엄마는, 그리고 아빠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멀리 서울서 내려오느라 고생했다고 이리 앉으라고 어서 오라고 다들 그렇게 따스하게 맞아주시는대도 내 마음은 왜 그리도 쓸쓸하던지. 언제나처럼 음식을 장만하고 집안을 정리하는 삼촌 숙모들의 분주한 손놀림을 바라보면서 나는 이상하게 더 쓸쓸해졌다.
밤을 깎는 작은 아버지를 바라보면, 거기에서 늘 밤을 깎던 아빠가 생각났다. 전을 너무나 맛깔나게 부쳐내는 작은 어머니의 손놀림을 바라보면 전이라면 대한민국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잘 부치던 엄마가 생각났다.
사촌동생들이 "엄마~~, 아빠~~~" 하고 부르는 순간마다 그 자리에 있었어야 할 그러나 지금은 없는 엄마와 아빠의 빈자리가, 더는 그렇게 부를 사람이 없는 내 현실이 너무나 절감되어 눈가가 뜨거워지곤 했다.
명절날 점심을 함께 먹고 난 뒤에 삼촌들은 다들 짐을 챙겨 숙모의 친정으로 이동을 하곤 했다. 그럼 나도 홀로 짐을 챙겨 외가로 향한다. 외가에서도 엄마아빠의 빈자리가 더 크게 보이겠지만 그래도 살아남은 나는 산 자의 도리를 해야 했다. 그렇게 나에게 명절은 모두와 함께 하는 날이었지만 동시에 철저하게 혼자 남아있음을 느끼는 날이기도 했다.
누구도 내게 너는 혼자다 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우리가 너와 함께 있다 라고 말해줬다. 그러나 내 앞에 펼쳐지는 현실들, 내가 홀로 감당해야 하는 상황들은 오롯이 내 몫이었다. 혼자 기차 타고 외할머니댁에 가겠다는 내가 안쓰러운 삼촌이 해 줄 수 있는 건 외갓집까지 차로 태워다 주는 정도였다. 함께 들어가서 어른의 역할을 해 줄 사람이 내겐 없었다. 그리고 아무리 그때가 그리워도 무슨 수를 써도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그 사실만을 더 깊이 느낄 따름이었다. 숨을 그늘이 없다는 것, 엄마와 아빠가 없이 보내는 명절은 그런 것이었다.
그 힘든 순례를 마치고 나면 나는 힘이 다 빠진 모습으로 서울로 돌아왔다. 명절이 이렇게 순식간에 힘들고 서러운 날이 될 수 있다니,라고 곱씹으며.
아무도 내게 그러지 않았다. 모두가 나를 배려했고 사랑했다. 그러나 나는 혼자였고 그리고 손님이었다. 그곳은 내 집이 아니었다. 내 작은 자취방이 저 멀리 보이면, 이제 내게 정말 '집'이라고 부를 곳은 여기구나 싶어 또 눈물이 핑 돌았다.
엄마가 있는 집, 엄마가 차려주는 밥을 무례할 정도로 그냥 편하게 먹을 수 있는 집, 어른스러워 보이려 애쓰지 않고 손님이 되지 않고 편하게 뒹굴 수 있는 곳, 그래서 쉬고 싶을 때면 언제고 찾아갈 수 있는 집, 그런 집이 내겐 이 작은 자취방이라는 것을 다시 깨닫는 것이었다. 이 지구 상에서 내 몸을 편히 누일 곳이 이곳이라는 사실이 더 뼈저리게 느껴지는 명절은, 내게 그토록이나 추운 것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나는 이제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낯선 땅 프랑스에서 명절을 맞는다.
찾아갈 이도 없고, 찾아올 이도 없는 이곳에서 우리끼리 떡국을 끓여 먹고, 동그랑 땡에 잡채까지 만들어 먹고, 한복을 입고, 할머니와 삼촌 숙모들에게 전화를 드린다. 이 멀리에서도 보이스톡 하나면 쉬이 마음을 담아 전화할 수 있다니 세상이 참 많이도 변했다 싶다.
할머니에게도 외할머니에게도 8명이나 되는 고모와 삼촌, 외삼촌들에게도 차례차례 전화를 돌리며, 멀리 있으니 찾아뵙지 못하는 게 당연하고 연락 못하는 게 당연하다는 핑계를 대지 않는 나를 만난다. 평소엔 몰라도 명절만큼은 그럴 수가 없다. 왜냐하면 장남이셨던 아빠가 늘 내게 보여주셨던 모습이니까. 그래도 명절인데 하며 이것저것 음식을 준비할 생각에 분주한 내 모습을 가만히 바라본다. 엄마가 늘 내게 보여주셨던 모습이었다.
그리고 한 다리가 천리라는데도, 조카딸의 전화에 반가워서 어쩔 줄 몰라하며 고마워하시는 삼촌 숙모의 목소리를 들으며 또 한 번 깨닫는다. 엄마 아빠가 내게 남겨준 사람들이다.
엄마 아빠가 떠나고도 여기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이 분들이 계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토록 외롭고 쓸쓸하게 느껴지던 명절에도 그래도 찾아갈 곳이 있고 그래도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래도 나를 기다려주는 이들이 있다는 그 사실 때문에 견딜 수 있었던 것이라고.
시간이 이만큼 지나고 보니 그 아픔들이 감사로 해석된다.
세월을 이길 슬픔은 없다더니, 지나온 십여 년의 세월은 쓸쓸함을 딛고 살아갈 만큼 나를 단단하게 길러내었다. 거센 비바람에 더 굳게 뿌리내린 나무처럼 그 슬픔을 딛고 그렇게 엄마를 아빠를 기억하며 내게 주어진 이 하루를 살아간다. 감사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