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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앤느 Jan 16. 2021

세찬 비도 내 마음까지 적시진 못했다

어젯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지하철 역 밖으로 걸어 나오자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프랑스의 겨울은 이렇다. 예보를 따로 챙기지 않고도 늘 우산을 따로 챙겨야 하는 날씨다. 늘상 흐리고 비가 내리는 날씨. 그래서 쉽사리 우울해지기 좋은 날씨.


프랑스에 와서 가장 당황스러웠던 것은, 여름 내내 밤이 늦도록 지지 않던, 영원히 지지 않을 것 같던 그 태양이 가을의 시작과 함께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예고도 없이. 물론 늘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야 예고할 필요도 없이 당연한 일상이었겠지만, 적어도 나에겐 너무나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어제까지와 너무 다른 오늘이 펼쳐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더해 더욱 당황스러웠던 것은 부슬부슬 내리는 빗속을 우산 하나 없이 저벅저벅 걸어 다니는 이곳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잠바 모자 하나 당겨 쓰고서는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 사이를 우산을 쓰고 애써 비를 피하며 걷는 기분은 참으로 묘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나는 타고나길 비를 싫어하도록 타고났다.


그 차가운 빗방울이 내 피부에 닿고, 미끄러져 내리는 그 느낌이, 숱이 그리 많지 않은 내 머리칼을 다 적시고 마침내는 부들부들 떨게 만들 그 추위가 싫었다. 그래서 기어이 우산을 꼭꼭 챙겨 다니곤 했다.



그런 내가,

어제 따라 우산을 그만 잊어버리고 말았다.






지하철역을 향해 갈 때까지는 부슬부슬 손으로 머리칼을 털어버리면 될 정도로 내리던 비가 지하철을 내리고 나니 후두두둑 하며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마음에 순간 갈등이 일었다. 비를 맞고 싶지 않았다. 그 축축한 느낌, 그 차가운 느낌 속으로 굳이 나를 밀어 넣고 싶지 않았다.



피하려면 피할 방법이 없진 않았다. 굳이 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있을 남편에게 전화를 해 데리러 오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뜬금없이 언제까지 이건 싫어, 저건 불편해하며 피할 방법을 골몰하면 살 것인가 하는 의문이 내 속에서 떠올랐다. 나를 불편하게 하고 불안하게 하는 그 모든 걸 과연 피할 수는 있기는 한 것인가 하는 질문도 역시 피할 수 없었다.



문득 “비가 오면 빗속을 걸어라” 하던 어느 시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내 눈앞에 저 사람들도 빗속을 걷고 있었다. 일주일 내내, 아니 겨울 내내 내리는 그 빗속을 저벅저벅. 비를 뚫고 부지런히 자기 길을 가는 그 사람들의 모습이 그다지 서글프지 않았다. 오히려 묘한 생동감이, 리듬감이 느껴졌다. 신기한 일이었다.

내리는 비와 걷는 사람들 그리고 밤의 파리는 한 데 어우러져 마치 한 폭의 수채화 같았다.


그 밤의 힘인지, 그 밤을 비추려 켜놓은 가로등의 힘인지, 아니면 불현듯 생각난 시 구절의 힘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말없이 그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망설이지 않고, 뒤돌아보지 않고, 누가 나를 이 비로부터 구해줄까 두리번거리지 않고, 다만 앞을 향해 자박자박 걷는다. 빗줄기는 점점 더 세지고, 머리카락은 모두 젖어 헝클어지고 얼굴은 비로 범벅이 되었다.



'이게 뭐라고.. 별 것도 아니구만...'

내가 가장 싫었던 그 모습을 하고선, 나는 풋 하고 웃고 말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비에 젖기 전보다, 비에 젖고 난 뒤에 오히려 후련했다. 오히려 편안했다. 오히려 괜찮았다. 비를 피하지 않고 비를 맞으며 걷던 그 순간 나는 내 속에서 꿈틀대는 어떤 자유를 느꼈다. 비를 맞는 것쯤은 별 일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내가 꿈틀댄다.



문득 내 자신을 향해 묻는다.

이것만은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 이런 건 싫다는 그 느낌, 그리고 그걸 원하지 않는 무수한 까닭들을 굳이 찾아내어 내 마음 한 귀퉁이에 모아놓았던  무수히 많은 날들, 그래서 나는 행복했던가? 그것들을 피해보려 안간힘을 쓰며 살아왔던 그 시간들, 그래서 나는 정말로 피할 수 있었던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무수히 많은 문제들 앞에 마치 그 모든 문제들이 내 자신의 무엇을 결정짓기라도 하는 냥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며 그 무게를 내 마음에 지우고 살아온 시간들을 돌아본다. 내 마음을 향해 토닥토닥.

고생이 많았다. 그 무거운 짐을 이고 오느라.








저 멀리 집이 보인다. 오늘도 긴 하루 내 몫의 삶을 살아냈다는 안도감이 밀려온다.

걱정이 되어 나온 남편의 얼굴이 보인다.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마음이 따뜻해진다.

빗속을 아이처럼 웃으며 달려간다.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 곳을 향해.



그 세찬 비도 결국 내 마음까지 적시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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