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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앤느 Feb 10. 2021

추억은 힘이 세다

눈이 오는 일이 거의 없는 파리에 벌써 세 번째 눈이 내렸다. 하굣길에 신이 난 아이들과 집 앞 공원에서 한참을 놀다가 들어왔다. 어느새 자란 아들은 눈밭에 거의 뒹굴다시피 한다. 아무리 코로나라고 해도, 일 년에 한 번 볼까 한 눈을 못 본 척하라고 말하기가 영 그래서 놀게 해 줬다만, 그래도 찝찝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어어! 너무 더러워. 그냥 눈사람이나 만들어."

"어어! 미끄러워. 넘어지면 다치니까 천천히!"


엄마의 잔소리가 연달아 들려오자 아들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한마디를 한다.


"학교에서 놀 때가 좋았는데... (엄마의 잔소리도 없고)"


그 말을 듣고 보니, 네 녀석이 학교에서 어떻게 놀았을지 상상이 된다 상상이 돼 휴우~ 쫓아다니며 말릴 수도 없고, 말린다고 말려질 일도 아니고 그저 잘 지내겠거니 믿고 지내는 수밖에.



그렇게 하얗게 쌓인 눈 위를 걸으며, 눈을 던지며, 눈사람을 만들며 까르르르 넘어가는 아이들을 보다가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5살 무렵의 일이었다. 내가 자란 대구도 파리만큼이나 눈이 잘 오지 않는 동네인데 아마도 그때 눈이 많이 왔던 모양이다. 엄마가 슈퍼에 계란 한 판 사러 간다고 나를 데리고 나섰다. 눈 쌓인 골목길을 엄마 손을 잡고 신이 나서 걸어가던 기억. 뽀드득뽀드득 발 밑에서 사그라드는 눈을 느끼며 신기해서 콩콩콩 뛰어다니던 기억, 바람이 차다며 잠바 지퍼를 끝까지 올려주던 엄마 손길이 기억 속에 어렴풋이 남아있다.


그러나 정말 추억으로 남아있는 것은 계란을 사고 난 뒤였다.


그 당시 내가 살던 동네에는 좁고 경사진 언덕을 지나 길을 건너야 시장이 하나 있었는데, 거기까지 가서 어렵사리 계란을 사 가지고 엄마가 한 손에 들고는 또 다른 한 손으로 내 손을 잡고는 그 언덕 내리막길을 함께 내려가고 있었다.


올라갈 땐 잘 몰랐는데, 내려갈 땐 어찌나 길이 미끄럽던지. 그만 어린 내가 쿵 하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괜찮아?" 하며 엄마가 내 손을 잡고서는 나를 일으켜 주려 한다. 엄마 손을 잡고 엄마를 의지해서 일어나 보려고 버둥하는데 도리어 엄마까지 미끄러져 쿵 하고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엄마는 "아이코 계란 어쩌니... " 하시더니만 다시 일어난다. 나도 엄마 손을 잡고 다시 일어난다. 또 몇 걸음을 못 걷고 이번에는 엄마가 쿵 하고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진다. 엄마가 넘어지니 5살짜리 내가 견딜 수가 있나. 하는 수 없이 나도 쿵.


이 상황이 우스운지 엄마가 참지 못하고 "푸훗" 하고 웃는다. 그러자 5살짜리 나도 깔깔깔 하고 웃어버렸다.


"아이구 오늘 계란은 눈이 다 먹어치우겠다" 계란이 다 깨질까 그 걱정이 앞서던 엄마 마음에도 동심이 찾아든 것일까.  평소에는 무뚝뚝하기만 하던 엄마와 둘이 손을 잡고 그렇게 쿵, 쿵, 쿵, 쿵 한참을 엉덩방아를 찧어가며 사이좋게 내려왔다.


겨우 집에 도착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계란은 다 깨져 있고, 사러 갔던 게 무색하게 되었다. 그러나 엄마도 나도 괜히 사러 갔다고 말하지 않았다. 계란 한 판을 깨뜨려 가며, 그 엉덩방아를 찧어가며 엄마는 내게 평생 잊지 못할 추억 하나를 선물했다.



사 오고도 정작 나는 먹어보지 못한 그 계란을 눈 밭에 흩뿌리며 엄마와 나는 웃음꽃을 피웠다.





눈이 쌓인 눈길을 살금살금 아이들과 걸으며 그때를 추억해 본다.


엄마에게 살금살금 다가와 눈을 던지고 도망가는 아들 녀석을 향해 "요 녀석..." 하고 눈을 흘겨 주며 나도 눈 한주먹을 뭉쳐 던지며 그때를 추억해 본다.



아이들에게도 오늘이 그런 날이길,

이 작은 일상이 아이들의 마음속에 오래 남아서 두고두고 꺼내볼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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