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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앤느 Mar 04. 2021

"네가 가진 것이 가장 좋은 거야"

눈코 뜰 새 없는 2주가 흐르고 드디어 아이들은 학교로 돌아갔다.


방학을 해서 기뻤던 만큼, 개학을 하니 더 기쁜 엄마와 다르게 언제나 행복한 방학은 너무나 금방 지나간다며, 아쉬워하던 아이들. 그 마음을 위로해 주겠노라는 남편의 야심 찬 이벤트는 킨더 조이 초콜릿이었다.


내 보기엔 참 별 것 없는 그 약소한 초콜릿에, 더욱더 빈약한 작은 장난감이 뭐라고 아이들은 언제나 킨더라면 OK! 였다. 병원을 간다거나, 힘든 일정을 감당해야 할 때면 남편이 쉬이 꺼내 드는 카드가 킨더였고,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엄마에게 협상의 조건으로 쉬이 들고 나오는 것도 언제나 킨더였다.


프랑스는 한국처럼 1000원짜리 지폐 한 장으로도 빈약한 작은 장난감을 마음껏 고를 수 있는 다있소 같은 가게도  없기에, 작은 재정으로 아이들에게 달콤한 위로를 선사할 수 있는 쉽고 빠른 방법, 그것이 바로 킨더였다. 게다가 프랑스 킨더는 한 통에 세 개가 기본이라(물론 가격도 더 비싸다) 아이들 입장에서는  적어도 3일은 즐거워할 수 있으니 너무나 좋은 기회인 셈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남아용 장난감이 든 킨더와 여아용 장난감이 든 킨더만 있었는데 근래에 남녀 공용 킨더 초콜릿이 나온 것이다. (근래에 나온 것인지, 우리가 근래에 발견한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남자용 킨더와 여자용 킨더가 나뉘어 있을 때는 참으로 평화로웠으나, 둘이 똑같은 킨더를 사니까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바로 '비교'가 시작된 것이다.


"힝.... 오빠 꺼만 좋은 거 나오고...."


시작은 딸이었다. 자기는 똑같은 게 두 번 나온 반면, 오빠는 매일 다른 게 나오고 게다가 더 멋진 게 나왔다는 것이었다. 세상 억울한 딸은 그렇게 서럽게 울었다. 그리고 오늘, 나름 의젓하다 싶었던 아들이 소파 구석에 웅크리고서는 서럽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동생은 멋진 자동차가 나왔는데 자신은 공룡이 나왔단다.


"동생은 진짜 멋진 건데, 나만 이런 거야..."








아이들에게 킨더 장난감은 딱 하루 노는 장난감이었다. 영원히 가지고 놀만큼 소중한 것도 아닌데, 내겐 없는 무언가를, 내 것보다 조금 더 나아 보이는 무언가를 누군가 가졌다는 사실은 이토록이나 서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불과 며칠 전에 동생을 울릴 만큼이나 좋은 장난감이 자신에게만 나왔었다는 사실은 이토록이나 쉬이 잊히는 것이었다.




나라라도 잃은냥 속상해 있는 아들 옆에 슬그머니 다가가 앉는다.


'이게 뭐라고 이러니...' 한마디를 해 주고 싶던 마음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아들 모습에서 나를 본다.



그랬다. 그러고 보니 나를 힘들게 하는 것도 언제나 비교였다. 내게 주어진 삶이, 나라는 사람이 마음에 들고 괜찮다 싶다가도 누군가의 생을, 그리고 그 누군가가 누리며 살아가는 어떤 것들을 마주하면 왠지 내 손에 들린 것들이 시시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애쓰며 여기까지 왔다며 나를 향해 칭찬해주고 싶은 마음이 춤을 추다가도, 나보다 조금 더 잘 해낸 누군가 앞에 서면 금세 주먹을 움켜쥐게 되었다. 조금 더 해 내자고, 조금 더 가 보자고. 여기에서 멈출 수 없다고 금세 나를 몰아세우게 되는 것이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언제나 나보다 월등하게 뛰어나거나, 유능하거나,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보다 나와 비슷한 듯 조금 다른 사람들에게서 상실을 더 크게 느낀다는 사실이었다.  


나와 비슷한 누군가가 조금 더 잘하는 것을 바라볼 때, 나와 비슷했던 누군가가 조금 더 앞서 나가는 것을 지켜봐야 할 때, 나와 비슷한 줄 알았던 누군가가 나보다 조금 더 많은 걸 누리며 살고 있다고 느낄 때... 부끄럽게도 그런 순간이 나에 대한 만족도가 가장 떨어지는 순간들이었다.



나를 바라보지 못하고,

내 손에 든 것을 바라보지 못하고,

그것을 누리지 못하고


늘 누군가의 손에 들린 무엇을 바라보며 한탄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SNS를 통해 서로의 전시된 삶을 너무나 쉽게 열람할 수 있는 이 시대 한가운데를 거닐며, 또 때때로 우리 역시도 우리 삶을 그럴싸하게 포장하고 드러내야 한다는 압박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로 우리는 때때로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조금도 설명해 줄 수 없는 작은 것들을 앞에서조차 무너져내리곤 한다.


그렇게 그것이 내게 가지는 진짜 의미가 무엇인가를 스스로에게 묻지 못한 채, 늘 상대의 손에 들린 것을 바라보며 쉬이 울상 짓는 상실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언제나 네가 가진 그것이 가장 좋은 것이야.

그게 남들이 보기엔 되게 멋져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야 "


라고 아들에게 말해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를 향한 말이기도 했다.



글쎄, 객관적으로 그게 가능한 것인지는 알지 못한다. 겨우 서른 해를 조금 넘겨 산 이 짧은 인생이 생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 짧은 생에서 한 가지 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가진 그 초라하고 시시한 것들을 사랑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그것을 가지고도 짧은 이 생을 제대로 누릴 수 있다는 것.  



Vous m'avez donné de la boue et

j'en ai fait de l'or.

당신이 내게 진흙덩이를 주었고

나는 그것으로 금을 만들었다.



프랑스에는 이런 격언이 있다.

그러고 보니 다른 이의 손을 바라보며 내 손에 든 것이 고작 흙덩이라고 한탄 한 사람이 나만은 아니었나 보다. 그 사실이 작은 위로가 된다.





"아들 우리 공룡 장난감 가지고 화석 만들기 할까?"



잠시 감정을 추스르고 난 아들이 벌떡 일어난다.

동생 자동차를 보느라 눈에 들어오지 않던 공룡 장난감을 들고서는 성큼성큼 걸어온다. 종이 한 장 꺼내 그 공룡 위에 올려두고 연필로 진하게 색칠을 해 본다. 그러자 금세 화석이 만들어진다. 아들의 얼굴에 미소가 한가득 떠오른다.


책장에서 올록볼록한 보드북들을 꺼내와 본격적으로 이것 저것 화석을 만들기 시작한다. 그렇게 아들은 이제까지 해 보지 못한 새로운 놀이를 신나게 했다.




그 아이 손에 들린 흙으로 함께 금을 만들어 내면서

나 자신에게 들려준다.


"네게 주어진 이 모든 것이...

 네가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는 이 모든 생이...

 네게 가장 좋은 거야."


 



그만 두리번거려야겠다.


그저 내 손에 들린 이 진흙덩이를 가지고

반드시 나를 만들어 내리라

금도 은도 말고

누구보다 조금 더 나은 '나'도 말고

그저 '나'를 만들어가리라...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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