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2년 전의 이야기다.
며칠 전부터, 휴대전화에 자주 외할아버지 번호가 부재중으로 남아있었다. 낮 시간에 이렇게 빈번히 전화를 하실 분이 아니신데 이상한 일이었다.
금세 다시 전화를 드려 보아도 받지는 않으셨다. 집으로 전화를 해도 아무도 받는 이가 없다. 불길한 생각이 자꾸만 밀려왔다.
애써 아닐 거라 거듭거듭 곱씹어 보지만 일렁이는 마음을 붙잡을 길이 없었다. 컴컴한 방안에 시끄럽게 세상 이야기를 떠들어 대는 텔레비전을 켜 놓고우두커니 앉아 계시던 뒷모습이, 외로움이 가득 묻어나던 모습이 자꾸만 눈에 아른거린다.
며칠이 지난 뒤, 대구로 향하는 KTX에 몸을 실었다.
“의사가 암 말기라 안 카나... 오래는 못 사시지 싶다. 니한테는 걱정한다꼬 얘기하지 마시라 캐가...”
슬픈 예감은 이렇게 적중했고, 나는 또 한 번 내 인생에 찾아든 상실을 어떻게 맞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벌써 세 번째인데도 여전히 이런 일은 너무나 막막했다.
외숙모에게 뭐라고 대답을 하고 전화를 끊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만 대구를 가야겠다는 생각과 그리고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슬픔을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본능이 내 속에서 격렬한 전쟁을 일으키고 있었다는 것만을 기억할 뿐이다.
그러나 결국 대구로 향하는 기차를 타고 말았다. 기차가 출발하고 차창 밖으로 풍경을 바라보며 요 며칠 내게 일어난 이 일들에 대해 생각했다.
마침내, 외할아버지와 통화가 되었던 그날, 휴대폰에는 외할아버지로부터 온 부재중이 열 통 찍혀있었다. 여러 사람에게 전화를 돌리고 돌려서 어렵게 목소리를 듣게 되었지만 외할아버지는 반가워하기보다 미안해하셨고, 당황해하셨다.
“야야, 내 전화기가 영 이상타. 내가 어디 전화를 좀 할라고만 하면 자꾸 니한테 걸린다 아이가. 내가 지금 벌써 몇 번째 전화를 끊었는가 모르겠다.”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통신상의 문제였는지, 외할아버지의 서투른 실수 혹은 간절한 그리움이었는지 아니면 결혼 이후 외할아버지께 일 년에 한두 번 전화를 드리는 게 고작인 손녀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였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그러나 나는 그로 말미암아 마지막 기회를 얻은 셈이었다. 배려라는 이름으로 영원히 누릴 수 없을 뻔 했던 그 기회를.
사실 나에게 대구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나는 그 도시에서 엄마를, 그리고 아빠를 차례로 잃었다. 누군가에겐 아름다움이 꽃피는 계절이라 하는 이십대가 내겐 생의 비극을 맛본 가장 추운 계절이었고, 아무리 더듬어 만져보아도 길을 찾을 수 없는 막막한 시간이었다.
엄마와 아빠와 함께 살았던 이십여 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그 도시가, 나에겐 눈물이자 아픔의 공간이 되어버렸다. 함께 했던 그 공간에서, 나만 남겨놓고 사라져 버린 엄마와 아빠를 추억하지 않고서 현재를 살아갈 재간이 나에겐 없었다.
지나가는 740번 버스만 보아도 눈물이 쏟아졌고, 동네마다 흔하디 흔한 은행 앞에서도 마음이 무너졌으며, 그리고 함께 웃고 떠들다가도 8시가 되면 반겨주는 집으로 돌아가는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매일 밤 상실을 새로이 경험해야 했다. 나에게만 일어난 비극과 변화를 나는 매일 두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더는 견딜 수 없었다. 떠나야 했다. 떠나지 않고는 살아남을 자신이 없었다. 더는 상실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동대구역에서 KTX를 타고 서울로 떠났다. 이십여 년의 인생을 고스란히 뒤로 하고, 나는 이방인의 삶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서울에서의 삶도 여전히 외로웠지만, 여전히 때때로 슬픔을 이길 수 없을 것 같는 순간들이 있었지만, 적어도 이 낯선 도시에서는 엄마 아빠의 흔적을 마주하는 일은 없으니까. 그제 서야 숨을 조금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제 나는 그렇게 모든 걸 남겨두고 돌아서서 도망쳐온 그 도시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혼자서. 그리고 다시 상실 앞에 서야 한다. 담담히.
결혼하겠다고 외할아버지께 처음 인사를 드리러 갔던 날이 스쳐 지나간다. 평생 자신의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으시는 일이 없으신 무뚝뚝한 경상도 어르신인 할아버지께서 남편 앞에서 외할머니와 결혼하시던 이야기를 들려주셨을 때, 나는 참 신기했다.
결혼 날을 받아 놓고도 신부 얼굴 한 번 못 봤다는 이야기, 결혼식 날도 까맣게 잊어서 전보를 받고는 황급히 고향으로 내려가셨다는 이야기...
이야기를 이어가시다 간혹 홀로 터뜨리시는 웃음이며 뜸 들이며 내뱉으시는 그 이야기들 한 마디 한 마디 속에서 할아버지의 즐거움이 느껴졌다. 그저 지나쳤던 할아버지의 반응을 나는 그제야 깨닫는다. ‘할아버지가 그때 정말 기쁘셨구나... 내가 결혼한다는 소식에 마음이 좋으셨던 거구나...’
그리고 몇 달 뒤, 내 결혼식장에 찾아오셨던 외할아버지를 잊을 수가 없다. 신부대기실에 앉아있는 나를 멀찍이서 바라보시던 그 눈빛. 선뜻 다가서질 못하시고 멀찍이서 한참 뚫어져라 바라보시던 모습에서 왠지 쓸쓸함이 느껴졌다.
“가이소, 웨딩드레스 예쁘게 입은 외손녀랑 사진 한 판 찍으시야지예. 여서 이러지 마시고 어서 가이소.”
외삼촌과 외숙모의 호들갑에 못 이기는 척 느린 걸음으로 다가오셔서 내 옆에 앉으셨을 때 외할아버지의 손을 꼭 잡아드렸다. 외할아버지의 눈동자는 분명 나를 향하고 계셨지만 어쩌면 내 곁에 당연히 있었어야 할 당신 딸의 빈자리를 그토록 오랫동안 바라보고 계셨는지도 모르겠다.
‘야야 네가 살아서 이 결혼식을 봤어야지...’ 어쩌면 그 마음으로 그렇게 한참을 황망히 서 계셨는지도 모르겠다.
사진을 찍고 나서 “야야 잘 살아래이. 잘 살아라... 잘 살아야 된다이.” 몇 번이고 거듭 말씀하시곤 일어나시는 외할아버지께 외삼촌이 다시 말씀하셨다.
“에이 아부지요, 한 번 안아 주이소. 이제 시집가면 자주 보도 몬한다 아입니까.”
그렇게 외할아버지 품에 잠시 안겼을 때, 나는 그때 알았다.
사람이 눈물을 흘리지 않고도 온 몸으로 울 수 있다는 것을. 외할아버지는 온몸으로 울고 계셨다.
엄마를 떠나보낸 뒤 내 앞에서 한 번도 내색한 적은 없으셨지만 그동안 가슴에 사무쳤을 딸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이, 그리고 엄마를 일찍 잃고 살아온 손녀에 대한 아픈 마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좋은 날이 왔다는 것에 대한 기쁨이 뒤섞여 온몸으로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그 눈물이 나를 적셔서 나 역시 온몸으로 울었다. 결혼식 내내.
나중에 결혼식에서 찍었던 사진들을 받았을 때 나는 외할아버지와 둘이서 찍은 사진을 크게 인화했다. 그리고 액자에 정성스레 담아 외할아버지께 보내드렸다. 아무런 부연설명 없이 보내드린 사진이었지만 나는 안다. 외할아버지도 다 아실 거라는 걸. 그날 우리는 어떤 연대감을 느꼈으니까. 부쩍 외할아버지가 가깝게 느껴졌다.
상념에 젖어있는 사이, 기차는 어느새 동대구역에 도착했다. 익숙한 그 역을 유유히 빠져나와 버스정류장으로 향한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뭐가 얼마나 달라졌을까 싶어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보는데, 자꾸만 엄마가 그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다. “엄마.. 이럴 때 엄마가 있었음 얼마나 좋았겠어...” 넋두리처럼 혼잣말을 내뱉고는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향한다.
활짝 폈던 벚꽃이 한올한올 날리더니 살며시 바람이 불자 꽃비가 되어 내린다. 참고 또 참았던 눈물이 또로록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엄마를 향한 그리움은 변하지 않고 늘 제자리다.
그러나 쏟아지는 벚꽃을 바라보며 ‘어쩌면 엄마도 내 생각을 하는 걸까... 어쩌면 이것이 엄마의 눈물일까?’ 하고 생각하자 끝도 없이 쓸쓸해지던 마음에 작은 위로가 흐른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낯익은 풍경 속에 자꾸만 그려지는 엄마와 내가 함께 걷던 모습들이 어쩐지 더는 슬프지 않다. 도망치듯 달아나야 했던 차갑디 차가웠던 그 도시가 흩날리는 벚꽃으로, 엄마의 위로로 가득 채워진다.
그렇게 찾아간 병동 앞에서 나는 몇 번이고 숨을 고른다. 이 마지막 인사를 잘하고 싶었다. 결혼식에서 외할아버지의 몇 마디 말과 그 포옹으로 내가 외할아버지의 마음을 다 느꼈던 것처럼 이 작은 가슴으로 그렇게 외할아버지를 안아드리고 싶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병실을 찾아 헤매다 드디어 병실을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앙상하게 마른 외할아버지의 모습에 마음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저렇게나 편찮으셨구나...' 죄송한 마음에 눈물이 고인다. 그러나 나를 보자마자 외할아버지의 눈은 반짝였다.. ‘기다리고 계셨구나... 실수로 걸려오던 그 전화가 정말로 하나님의 선물이었구나...’
“외할아버지 저 왔어요. 많이 기다리셨죠?” 몇 마디 내뱉지도 않았는데 목이 메여온다.
“야야 만다꼬 멀리까지 왔노.. 아들은 잘 크나? 조서방도 잘 있제? 그래 고맙다 그래 고맙다...” 말을 잇기가 힘들어 앙상하게 마른 두 손을 꼭 잡아드렸다.
“야야... 인생이 참 짧다. 마음을 크게 묵고 살거라이...”
“할아버지 엄마 만나거든 꼭 안부 전해주세요. 저 잘 살고 있다고 걱정 말라고 전해주세요.”
귀까지 어두워져 들리지도 않으신다는 데도 고개를 끄덕끄덕하신다. “오야 오야” 하고 대답하신다. 그렇게 마음으로 우리는 서로에게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나는 정말 마지막일지도 모를 이 만남을 뒤로한 채 다시 내 삶의 터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눈물을 꼭 머금고 외할아버지를 마지막으로 안아드렸다.
그날, 외할아버지는 더는 온몸으로 울고 계시지 않았다. 오히려 험난했던 일평생, 생이 던져주었던 모든 아픔과 눈물을 받아들이고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받아들이신 외할아버지의 단단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평안함 가운데 온몸으로 내게 너의 행복을 비노라 말하고 계셨다. 그 따스함이 내게로 흘러와 내 마음 속 깊은 눈물들을 닦아주고 있었다.
“야야 인생 참 짧다. 아픈 거, 슬픈 거 마음에 안고 살지 말고 예쁜 거, 좋은 거 보며 살거라이. 이제 너거 엄마도 고마 잊어뿌고. 내가 간다고 그것 또한 연연치 말고 야야 부디 행복하거라이...”
그렇게 며칠이 흐르고 나는 다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외할아버지가 엄마 곁으로 가셨다 한다.
그날 전화를 받던 그 길에도 벚꽃나무가 있었다. 꽃잎이 흐드러지게 피어 날리고 있었다. 나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봤지만, 많이 울지는 않았다.
그렇게 외할아버지는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내 마음의 차디찬 기억을 따스하게 바꿔놓고 가셨다. 어쩌면 이 또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배려였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