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저 아래에 보이는 저 집 말이야, 저기서 개나 키우면서 살면 좋겠다"
아빠가 언덕 아래 다 허물어져가는 오래된 시골집을 가르키며 말했다. 그 근처에는 집이라곤 그 집 밖에 보이질 않았다. 낡고 을씨년스러워 보이는 그 집이 아빠의 눈에는 낙원이라도 되는 냥, 아빠는 뚫어져라 바라보며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한마디 말속에 담긴 아빠의 속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졌지만, 어쩐지 동조해주고 싶지도, 아는 척해주고 싶지도 않았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몇 달이 채 지나지 않아서의 일이었다. 아빠와 함께 엄마를 보러 가자며 나들이처럼 나선 길이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어디로 모실 건지 어른들 사이에 많은 논의가 있었던 모양이지만, 결국 아빠는 집에서 가장 가까운 시립 납골당으로 모시기로 결정했다. 대구와 칠곡의 경계 어느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집에서 724번 버스를 타고 30분쯤 간 뒤에, 어느 고등학교 앞에서 내린 뒤 걸어서 대구에서 칠곡으로 건너가 시골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가면 납골당이 나왔다.
신기하게도 대구라 이름 붙여진 길을 걸을 땐 그래도 도시의 바람이고 도시의 향이다가 고가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여기서부터 칠곡군입니다"라는 표지판이 보이고 나면 완연한 시골이었다. 보이는 경치도, 불어오는 바람도, 향기까지도 모든 게 시골이었다. 겨우 100m 거리가 이토록이나 다르다니.
아빠와 나는 엄마를 보러 가자고 나선 길이면서도 최대한 엄마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걸었다. 그게 서로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을까.
마음속에는 그때 조금만 더 잘해줄 걸, 하는 생각이 가득 들어차 있었지만 그래서 누군가에게라도 고해성사라도 하고 싶은 마음으로 살고 있었지만 정작 아빠와 나는 서로에게만큼은 더욱더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냥 날씨가 좋다 라거나, 그래도 멀지 않은 곳에 모시길 잘했다거나 그런 이야기들만을 나눌 뿐이었다.
집을 나서서 잠시 슈퍼에 들려 엄마가 좋아했던 음료 밀키스를 사고, 빵이라던가, 과일이라던가 하는 것들을 무심히 샀다. 너무 많은 마음을 담으면 눈물이 나니까, 우리는 모든 일에 최대한 무심하게 반응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버스를 타면 금세 말이 사라지고 서로 창 밖을 바라보았다. 나는 버스에 앉아 창 밖을 볼 때면 엄마를 생각했다. 학교를 갈 때도, 집으로 돌아올 때도, 친구를 만나러 시내에 나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시간만큼은 아무의 눈치도 보지 않고 하염없이 내 감정 속에 빠져들 수 있었다. 가끔 눈물을 훌쩍이며 닦아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을 정도로 버스는 적당히 시끄러웠고 분주했다. 나는 그런 소란스러움이 좋았다. 티 내지 않고 슬퍼할 수 있으니까. 그러고 보면 아빠도 그랬던 걸까. 우리는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씩씩한 척, 그렇게 웃으며 집을 나섰지만 버스를 타자마자 순식간에 침묵 속에 잠기곤 했다.
걸을 땐 그래도 좀 나았다.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건, 그래서 언제나 옳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동안이 가장 견디기 어려웠다. 누굴 만나거나, 무언가를 하고 있을 때면, 아니 하다 못해 걷기라도 하면 그래도 좀 살 것 같았다.
저 멀리 보이는 푸른 나무가 어느 날은어느새 울긋불긋 단풍이 들어 있었고, 어느 날은 금세 잎사귀를 다 떨구고 있었다. 나무가 참 곱게 물들었다, 날씨가 춥다, 어느새 봄이구나... 그렇게 아빠와 무심한 대화를 이어가며 계절마다 시골길을 나란히 걸어서 엄마를 만나러 갔던 그 시간들이, 또 이렇게 한 편의 그림처럼 남아있다.
엄마를 보러 왔다지만, 그곳에는 엄마가 없다.
"왔니?" 하고 맞아줄 사람이 없다. 우리는 그걸 알면서도 굳이 "엄마를 보러 간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곳에 정말 엄마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냥 행동하곤 했다. 엄마 앞에서 어색하게 몇 마디를 굳이 소리 내어 말하며 호들갑을 떨어본다. 내가 그렇게라도 내 신념을 지켜보려 애쓰는 동안, 아빠는 여전히 무심히 멀찍이서 엄마의 사진을 내려다보곤 했다.
납골당 안에는 언제나 울음소리가 들렸다. 알 수 없는 누군가들의 슬픔이 늘 묻어있었다. 숨죽여 꺽꺽 우는 그 울음소리를 듣고 있으면, 내 속에 꽉꽉 눌러두었던 슬픔도 함께 찰랑였다. 그래서 나는 더 밝은 목소리로 "엄마 나 왔어" 하며 위장을 하곤 했다. 그런 나를 보는 게 안타까웠던지, 아니면 아빠의 슬픔도 찰랑여서 더는 견디기가 힘들었던 건지, 언제나 "이제 그만 나가자" 하고 먼저 말을 꺼내는 것도 아빠였다.
그렇게 나와서 볕이 드는 자리에 밀키스와 무심히 산 과자나 과일들을 꺼내 놓고선 우리는 또 날씨 이야기나, 풍경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러다 까치라도 날아들면, 아빠와 나는 입을 맞춘 듯이 "엄마가 왔나 보다" 하고 말했다. 날이 궂어 비라도 쏟아지면 "엄마도 우리처럼 슬픈가 보다" 하며 후다닥 짐을 챙겨 비속을 부지런히 걸어 내려갔다. 날씨가 좋으면 "우리가 온 게 엄마도 좋은 모양이지" 하고 말했다. 그 모든 것은 엄마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그렇게라도 엄마의 존재가 존재하고 있다고, 이 우주 어딘가에라도 반드시 깃들어 있을 거라고 고집을 부리곤 했다. 그 고집은 이상하게도 위로가 되었다.
그리고 그날,
엄마가 떠나고 육 개월이 채 지나지 않았을 그 무렵 아빠는 나에게 말했다.
이 모든 일련의 일들을 마치고 납골당 위에서 내려다본 옆 마을에는 마을이라 부르기 무색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던 그 공터에는 집이 한 채 있었다. 다 허물어져가는, 그러나 여전히 누군가가 살고 있는 듯이 보이는, 잘 가꾸어진 텃밭과, 묶여있는 개가 보이는 시골집이었다.
아빠는 마음의 빗장이 풀어진 사람처럼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한마디를 툭 던져버렸다.
"저기, 저 아래에 보이는 저 집 말이야, 저기서 개나 키우면서 살면 좋겠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마음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아빠와 엄마는 내가 독립하고 나면 시골에 가서 개나 키우면서 살겠노라 하며 시골에 작은 집을 한 채 마련해 두었었다. 어찌 보면 아빠의 그 말은 못 이룬 그 꿈, 엄마 가까이에서 엄마를 보면서 이루고 싶다는 푸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이 엄마 곁으로 가고 싶다는 말처럼 들렸다. 그래서 싫었다. 아빠가 엄마를 너무 많이 그리워하는 게, 싫었다. 나도 그리워서 죽을 것 같이 힘들면서도, 아빠는 제발 잘 견뎌주길, 나보다 더 단단하게 서서 나까지도 지탱해주길 바랬다. 그래서 아빠의 그런 지나가는 말 한마디에도 나는 웃으며 아빠 마음을 위로해주거나 받아줄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1년이 더 지나고
결국 아빠도 엄마 곁으로 가셨다.
아빠는 엄마를 모신 납골당에 함께 모셔졌다. 개를 키우며 살고 싶다던 그 집 보다 더 가까운 곳이었다. 아빠는 그래서 행복할까? 늘 그 물음이 가슴 속에 남아 있었다.
이제 더는 한가진 일요일 아침, 늦잠이나 자려고 뒹굴대는 내게 "엄마 보러 갈래?" 하고 물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아빠는 애써 그 길을 또 걷는 수고 따위 않고도 엄마와 가까이 있을 터였다. 나는 홀로 남았지만 말이다.
신기한 일이었다. 아빠가 있을 땐 그렇게 의미부여를 하며 애를 쓰고 기를 쓰며 엄마를 보러 갔던 내가, 홀로 엄마와 아빠를 보러 가고자 하는 마음이 영 생기질 않았다.
딱 한 번인가, 무심히 일어나, 무심히 음식을 챙기고, 무심히 740번 버스를 타고, 무심히 걷고 걸어 납골당에 도착한 적이 있었다. 나는 까치를 보면서도 엄마가 좋아하네, 쾌청한 날씨를 보면서도 아빠가 좋아하네 하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때 처음 알았다. 어떤 의미부여도, 사랑을 받고 있을 때에나 가능하다는 것을. 지지해주는 사람이 있고, 들어주는 사람이 있고, 함께 맞장구쳐주는 사람이 있을 때에나 가능하다는 것을.
아빠가 사라지고 난 뒤에 나는 엄마가, 아빠가 거기 있을 거라는 믿음이 사라졌다. 나를 지켜주고 있을 거라고, 나를 여전히 기뻐해주고 있을 거라고, 그렇게 바득바득 우기며 살아왔던 그 시간들도 모두 다 그렇게 사라지고 나는 더는 납골당을 가지 않았다. 그 모든 의미부여가 사라진 납골당은 쓸쓸하고 춥기만 한 곳이었다.
대구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엄마와 아빠를 찾았다. 도무지 혼자 갈 자신이 없어, 가장 친한 친구에게 부탁을 했다. 그렇게 엄마 아빠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선 나는 미련 없이 서울로 떠났다.
몇 년 뒤, 남편을 만나고 결혼을 하기로 했을 때, 어른들에게 인사를 드리러 가자는 이야기 중에 가장 먼저 납골당이 떠올랐다.
대구에 있는 외가와 김천에 있는 친가에 모두 인사를 드려야 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정보다 가장 먼저 가야 할 곳은 납골당이었다. KTX를 타고 동대구역에 내린 뒤, 몇 번의 환승을 거쳐 또 대구의 끝트머리 어드멘가에 내렸다. 저 멀리 고가도로가 보이고 "여기서부터 칠곡군입니다"하는 간판이 보이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완연한 대구의 여름, 그 더위를 뚫고 남편과 나는 손을 잡고 걷는다.
"많이 덥지? 조금만 더 걸으면 돼" 하며 친절하게, 마치 친정집 가는 길목을 소개하듯 그렇게 조잘조잘 떠들며 걷는다. 꽃가게에 들러 작은 꽃을 사고, 그리곤 함께 걷고 또 걸어서, 엄마 이야기, 아빠 이야기를 하며 그렇게 납골당에 도착한다.
"왔니?" "자네 왔는가?"
아무도 정다운 인사를 건네지 않는 납골당에 들어가서 엄마 한 번, 아빠 한 번, 그 앞에 서서 "엄마 나 결혼해." "아빠 나 결혼해." 하며 또 어색하게 혼잣말을 해 본다. 나보다 이 상황이 더 어색할 남편은 그저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을 뿐.
그러고 돌아서서 나온다.
언제 또 올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는 걸음을 걸어서 다시 버스를 타려고 걷고 또 걷는데 갑자기 후다다다닥 빗방울이 돋는다. 어른들을 만나려고 곱게 차려입은 정장이 젖을까 고가 다리에 서서, 어쩌지 어쩌지, 버스 정류장까지는 아직 한참을 걸어야 하고, 약속시간은 다 됐는데, 어쩌지 어쩌지, 둘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갑자기 버스 한 대가 기적처럼 우리 앞을 스쳐가다 멈춰 선다.
250번 버스.
집에서 엄마 납골당까지 단 번에 오는 버스라고 들었는데, 몇 년 동안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그걸 타느니 걷겠다던 그 전설 속 버스가 기적처럼 남편과 내 앞에 멈춰 선다. 정류장도 아닌 곳에서.
"어서 타이소~"
기사님의 무심하면서도 친절한 음성에 얼른 버스에 타서 자리를 잡고 앉는다. 우리가 타길 기다렸다는 듯이 하늘이 뚫린 듯이 비가 쏟아진다.
엄마랑 아빠가 나를 반겨주지 못해서, 결혼식을 지켜주지 못해서 많이 슬픈가?
사위 사랑은 장모라는데 시 암탉 한 마리 해 주지 못하는 엄마의 마음이 많이 아픈가?
딸 바보 아빠는 딸 시집보낼려니 영 아쉬운가?
혼자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 불현듯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생각났다.
"자기야"
"......"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던 남편의 따스한 눈을 마주 보며 나는 말을 이어간다.
"엄마 아빠가 자기를 정말 많이 환영하나 봐. 그래서 이렇게 버스도 보내주나 봐. 조서방 고생하지 말고 잘 가라고."
아빠가 떠나고는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의미부여를 하며, 나는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남편을 올려다본다. 남편의 눈망울에도 눈물이 맺힌다.
더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감사했다.
그렇게 우연 속에서 기적을 찾아내며, 나는 다짐한다. 행복하겠노라고. 엄마 아빠의 바람처럼, 부디 행복하겠노라고.
그것이 내가 엄마아빠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의미부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