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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앤느 Jun 10. 2021

외국에서 아이를 기르는 엄마들의 소박한 바람


매주 수요일이면 나는 한글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난다.


국어교육을 전공했고, 집에서 아이들을 기르는 동안 틈틈이 외국어로서의 한국어 교육까지 공부를 했지만 사실 모국어가 한국어가 아닌, 한국어보다 프랑스어가 훨씬 편안하고 익숙한 아이들을 데리고 한국어를 공부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멈출 수 없는 까닭이 있다.



그것을 설명하자면, 처음 프랑스에 왔던 시기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나는 프랑스에 도착한 그 해에, 프랑스 학교에서 너무나 섬같이 외로울 두 아이를 위해서 한글학교에 등록을 했다. 일주일에 한 번 한글학교 가는 날만이라도 충분한 위로를 경험하길 바라면서.


그러나 등록하고 두 달 좀 넘게 다녔을까? 파업을 좋아하는 나라 프랑스에서 대대적인 대중교통 파업이 일어났다. 버스는 간혹 다니기도 했지만 탈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한겨울의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파리를 사람들은 걷고, 뛰고, 자전거나 전동 킥보드를 타고 다녔다. 도로 위는 하루 종일 각종 승용차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상태가 거진 두 달 가까이 지속되었다.


지하철을 타고도 1시간가량이 걸리는 거리의 한글학교를 어린애들 둘을 데리고 걸어갈 수는 없었다. 그리고 사실 나는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이 그다지 절박하지 않았다. 우리 아이들은 한국어가 모국어였고, 나와 소통하는데 1도 불편함이 없었다. 붙잡고 가르치지 않았지만 자연스레 한글도 다 뗀 상태였다. 그래서 우리의 긴 결석이 시작되었다.



파업이 지나가고 나니, 코로나가 시작되었다.

하필 한글학교는 중국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에 있었고, 그 지역은 여러모로 접근하기가 불편한 지역이 되어 있었다. 한 달 남짓 학교가 다시 열렸다가 결국 여러 가지 위험요소들 때문에 곧 닫혔다. 그렇게 기나긴 온라인 수업을 시작했고, 그리고 1년의 교육과정을 다 마칠 때까지 학교는 다시 열리지 않았다.



이것이 내가 경험한 첫 한글학교였다.


나는 별 감흥도, 감동도 없었다. 그리고 '내년엔 굳이 보내지 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내 마음을 움직인 건 아이들의 현장 수업 때 모습을 모아서 만든 동영상이었다. 담임 선생님이 열심히 준비해서 온라인 종업식 때 보여준 그 동영상을 보다가 나는 문득 한 가지를 깨달았다.


그건 바로, 한불 가정, 그러니까 엄마나 아빠 중 한 사람만 한국인인 가정의 아이들은 그 험난한 모든 시간을 뚫고 한글학교 수업에 참여했다는 사실이었다. 파업이 기승을 부리던 그 시기에도, 코로나로 위태위태하던 그 시기에도... 또 코로나 직전에 있던 설날, 그 설날을 기념하던 수업 때에도 프랑스에서는 구하기도 힘든 한복을 입고 교장 선생님께 세배를 하고 있었다.


그 동영상을 보는 내내 이상하게 마음이 쿵쿵 뛰었다. 그리고 그때 한 한불 가정 엄마가 담임선생님께 했던 말이 생각이 났다.


"우리 애가 수요일에 한글학교를 다녀오면 그날 저녁만이라도 한국말로 대답을 하더라고요. 선생님 정말 감사해요."



그날 이후, 여름방학 내내 그 동영상 속 아이들의 모습과, 그 엄마의 말이 자꾸만 내 가슴속을 떠다녔다.

설거지를 하다가도, 밥을 차리다가도,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다가도 자꾸만 생각이 났다.


내가 평생 살아온 곳, 내 나라, 내 일부가 되어있는 그 나라의 언어와 문화, 그런 것들을 내 아이들과 공유할 수 없는 환경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얼마나 절박한 일일까.


내 모국어로 내 아이와 함께 깊은 속내를 나누고, 내가 알고 있는 나의 세계가 내 아이에게도 익숙한 세계가 되길 바라는 그 마음은 정말로 얼마나 절절한 마음일까. 그리고 그 바람은 다른 누군기들의 바람이 아닌 이제 곧 닥쳐올 나의 바람이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한글학교 교사가 되었다.


수요일이면 2층 전철을 타고 파리 외곽에 있는 작은 한글학교로 떠난다. 내가 맡은 반에 모이는 8명의 학생들은 한국어의 수준만큼 자라온 환경도 제각각이다.


처음에 나는 조율되지 않은 악기를 연주하는 교향악단의 지휘자가 된 듯 모든 것이 조화롭지 않다고 느끼기도 했다. 모국어와 외국어의 어느 지점에 중심을 둬야 하나 혼란스럽기도 했고, 매주 가르치고 돌아서면 다음 주면 다시 그대로인 듯 보이는 아이들의 모습에 막막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나는 그 조화롭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스스로 조화를 만들어가는 아이들을 발견하고 있다. 여전히 서툰 한국어지만, 여전히 어려운 한글이지만, 그래도 적어도 내 옆에 있는 한국말을 잘하는 이 아이가 내 친구이고, 내 앞에 있는 프랑스 말을 잘하는 이 아이가 나와 같은 한국인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함께 자라 가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작은 희망을 발견한다.



이 작은 교실 안에서 아이들은 그렇게 작은 한국을 구현하며 함께 자라가고 있다.







프랑스에 한불 가정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한다.


요즘 같은 시대에, 어느 나라인들 안 그럴까 싶다. 그래서 나는 한글학교가 더 많아지면 좋겠다. 어느 나라에서나, 어느 지역에서나, 비록 몇 사람이라 할 지라도 그렇게 모여 함께 엄마의 나라를, 아빠의 나라를, 경험하며 자라 갈 수 있기를.


엄마의 나라가, 아빠의 나라가 이토록이나 따뜻한 나라라는 사실을 더 많이 느끼며 자라 갈 수 있기를. 그래서 자신 속에 심겨 있는 그 무언가를 부인하지 않고 더 아름답게 펼쳐내며, 프랑스와 한국, 자신의 뿌리로 이어지는 그 나라들을 모두 아우르는 너른 마음을 가진 아이들로 자라나기를,



그리고 결코 포기하지 않기를,

엄마의 간절한 마음과 같이 엄마의 언어로 엄마와 사랑하기를 결코 결코 포기하지 않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나는 한글학교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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