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 온 뒤, 나는 줄곧 부끄러웠다.
서른이 훌쩍 넘은 사람이, 5살 어린아이만큼도 말을 못 한다는 건 어딜 가나 쉬이 위축이 되는 일이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십여 년 전, 배낭여행을 왔을 때만 해도, 프랑스어라곤 Bonjour, Merci 밖에 할 줄 몰랐다. 그러나 나는 어디에서도 굴하지 않고 그 두 마디를 가지고, 그리고 유창하지도 않은 영어로 파리 시내를 마음껏 헤매고 다녔다. 내가 프랑스어를 할 줄 몰라도 사람들은 내게 호의적인 것 같았고, 프랑스는 제약이라곤 없는 자유의 땅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건 여행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걸,
프랑스에 와서 살기 시작하면서 알게 되었다.
똑같은 365일일 텐데, 유난히 길고 길었던 프랑스에서의 첫 1년을 돌이켜 본다. 사소한 행정 하나를 처리하는 것도 쉽지 않은 남의 땅에서, 말이 어눌한 외국인이라고 배려를 해 주긴 커녕인 낯선 외국 땅에서 하루하루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일은 매일 밀어냄을 당하는 것 같은 일이었다. 설령 아무도 날 밀어내지 않는다 해도, 나는 늘 밀어냄을 당하며 그 밀어냄을 거슬러 애를 쓰며 살아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참으로 고단한 일이었다.
그러나 어떨 땐, 어쩌면 밀어낸다는 이 느낌도, 다만 나만의 느낌이 아닐까, 어쩌면 이 사회에서의 나는 그 정도의 의미조차 없는지도 모르겠다 싶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면, 밀어냄을 당한다 여겨질 때보다 더 우울해 하곤 했다.
그랬다.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고 그리고 나 자신은 그저 작디작은 점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건 어쩌면 진리에 가까운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나는 낯선 프랑스에 와서야 실감하게 되었다.
마음이 이렇다 보니 매일 아침 아이들 등교를 시키려고 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갈 때마다, 아니 하다못해 마트에 장을 보러 간다 할 지라도 깊은 심호흡을 해야 했다. 길거리를 자유롭게까지는 아니더라도, 당당하게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래도 존재감을 갖고 걷기 위해서는 그 정도의 용기와 노력이 늘 필요했다. 그렇게 자꾸만 자존감이 뚝뚝 떨어졌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나는 한국이 더없이 그리웠다.
아니 한국에서의 내가,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라고 설명할 수 있었던 많은 근거들이 그리웠다.
직업이나 학력, 경력 뭐 그런 식상한 것은 고사하고, 하다못해 자란 동네라던가, 고향 같은 것, 좋아하는 음악이나, 글 혹은 잊지 못할 음식이나 학창 시절의 추억 같은 것들 말이다.
어학원을 다니고, 프랑스 사람들 틈에 어떻게든 들어가 보려고 노력할 때마다 이상하게도 나를 구성하고 있는 그 모든 경험과 기억들이, 여기에서는 전혀 무용지물이라는 것이 때론 허무하기도 했다.
내가 가졌고 이뤘다 생각했던 그 모든 것들이, 이 사람들과 이어질 어떤 연결의 고리도 되지 못한다는 사실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그것들이 하나도 없을 때의 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나, 그 존재를 생각하곤 했다.
저 사람들이 아무도 몰라줘도
내 인생이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내가 눈길 한 번 제대로 준 적 없어도
봄만 되면 어김없이 길가 어드매 스스로 꽃을 피워낸 작은 풀꽃이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처럼...
그렇게 나는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2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여전히 프랑스어는 어눌하고, 답답한 순간들이 참 많다. 여전히 말만 좀 더 잘해도 내가...! 하고 탄식하거나, 자려고 누웠다 이불킥을 하는 날들도 많다.
그러나 그 2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초라함을 견디는 법을 배운 것 같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하고 싶고 보여주고 싶은 욕망이 이글이글 대던 첫 한 해를 지나고 두 번째 해 마저 지나면서,
나는 알게 되었다.
내가 그렇게 나라고 정의 내렸던, 내가 가졌다고 여겼던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어쩌면 내가 끼적인 종이 한 장 같은 건지도 모르겠다고. 그 종이 한 장처럼 약하디 약한 그것을 기대어 살아보겠노라 움켜쥐었던 주먹이 그렇게 슬며시 펴졌다.
어쩌면 내가 누구인지 보다, 그걸 증명하고 보여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장 나답게 살아간다는 그 사실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직도 어설픈 프랑스어로, 그래도 내 몫의 삶을 살아간다는 그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일 것이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여기서의 내 삶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한국에서의 나는... 하던 그 생각을 조금씩 포기하고, 여기에서의 나를 받아들이며 격려하며 살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이 내 속에 깃들기 시작하던 며칠 전 아침이었다.
등굣길에 딸아이의 담임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작은 종이를 내밀며 서명을 해 달라고 했다.
딸아이 반이 곧 소풍을 간다고 했다. 동행을 해 줄 학부모를 구하고 있다고도 했다. 친절하게 또박또박 그는 내게 설명했다. 그리고 나는 무심결에 동행하겠다고 대답을 해 버렸다. 친절한 딸의 담임은 웃으며, 고맙다고 했다. 상황은 그게 끝이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프랑스어도 잘 못하는 나에게 꼭 동행해달라는 의미는 아니었을 것 같았다. 괜히 간다고 했나... 수심이 몰려왔다. 작년 아들이 소풍을 갈 때, 남편이 동행을 했었다. 딸아이는 그걸 무척이나 부러워했었다. 그리고 나는 종이에 동의한다고 적던 그 짧은 순간 딸아이가 행복해할 모습만을 떠올리곤 가겠다고 답을 하고 만 것이었다.
그러나 돌아서니 부끄러웠다.
그 사람들 속에 홀로 선다는 게, 영 자신이 없었다. 괜히 간다고 했다, 이제라도 못 가겠다고 할까, 수십 번도 더 갈등을 했다. 그러나 딸아이는 엄마가 함께 소풍을 간다는 그 말에 환히 웃었다. 그리고 나는 그 부끄러움이 내 몫이라면, 담담히 견뎌야겠다고, 네가 행복하기 위해서 내가 견뎌야 할 내 몫이라면 견뎌내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한 주가 흘렀다.
어제 딸과 함께 다녀온 소풍에서 역시나 나는 큰 도움을 드리지는 못했다.
내 딴에는 한다고 하는 프랑스어가 어린아이들에겐 영 다른 나라 말처럼 들렸던지, 진땀을 꽤나 흘렸다. 그러나 딸아이는 행복해했다. 아이들과 함께 걷던 중에도 옆에 서 있는 엄마가 어찌나 자랑스러운지, 엄마... 하고는 눈을 맞추고, 또 몇 걸음 걷다가는 엄마... 하고는 팔을 꼭 안았다. 나는 내가 부끄러운데, 딸은 내가 자랑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래도 엄마가 와줬다는 사실이 그래도 홀로 있지 않다는 그 사실이 이토록이나 든든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딸아이가 겪었을 고충을 가슴으로 느꼈다.
지난 2년 동안, '그래... 애들이 얼마나 힘들겠어...' 하고 생각했던 날이 참 많았다.
그러나 말이 통하지 않는 친구들 사이에서, 그래도 그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며 살아보려고 무던히 애를 쓰며 마음을 쓰며 견뎌왔을 딸아이의 삶이 이토록 진하게 경험된 건 처음이었다. 괜스레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리고 애를 쓰며 피워낸
딸아이 가슴 속 작은 새싹이 보였다.
부끄럽고, 초라한 그 시간을 이기며
존재해 온 딸아이의 2년의 시간이
애잔하게 가슴에 다가온다.
참 고맙다.
따라가길 잘했다고,
부끄러움을 견뎌내길 잘했다고,
도망가지 않고, 숨지 않고,
어설픈 모습 그대로 서서
딸아이의 곁을 끝까지 지켜줄 수 있어서 고맙다고.
그리고 그런 엄마의 모습을, 그 과정을,
엄마의 존재 자체를 자랑스럽게 바라봐준 딸이 너무나 고맙다고... 네가 나보다 더 너른 마음으로 나를 사랑하는구나... 애처로운 마음과 고마운 마음과 감격의 마음이 가슴 가득 차올라...
나는 잠든 딸아이의 모습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함께, 견뎌가야겠다.
부끄러움은 나의 몫, 네가 웃을 수 있기를
네가 견디듯, 나도 내 초라함과 부끄러움을 견디며
네가 자라듯, 나도 너와 같이 자라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