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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앤느 Jun 26. 2021

초라함을 딛고 '존재'하며 살아가기

프랑스에 온 뒤, 나는 줄곧 부끄러웠다.



서른이 훌쩍 넘은 사람이, 5살 어린아이만큼도 말을 못 한다는 건 어딜 가나 쉬이 위축이 되는 일이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십여 년 전, 배낭여행을 왔을 때만 해도, 프랑스어라곤 Bonjour, Merci 밖에 할 줄 몰랐다. 그러나 나는 어디에서도 굴하지 않고 그 두 마디를 가지고, 그리고 유창하지도 않은 영어로 파리 시내를 마음껏 헤매고 다녔다. 내가 프랑스어를 할 줄 몰라도 사람들은 내게 호의적인 것 같았고, 프랑스는 제약이라곤 없는 자유의 땅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건 여행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걸,

프랑스에 와서 살기 시작하면서 알게 되었다.




똑같은 365일일 텐데, 유난히 길고 길었던 프랑스에서의 첫 1년을 돌이켜 본다. 사소한 행정 하나를 처리하는 것도 쉽지 않은 남의 땅에서, 말이 어눌한 외국인이라고 배려를 해 주긴 커녕인 낯선 외국 땅에서 하루하루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일은 매일 밀어냄을 당하는 것 같은 일이었다. 설령 아무도 날 밀어내지 않는다 해도, 나는 늘 밀어냄을 당하며 그 밀어냄을 거슬러 애를 쓰며 살아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참으로 고단한 일이었다.



그러나 어떨 땐, 어쩌면 밀어낸다는 이 느낌도, 다만 나만의 느낌이 아닐까, 어쩌면 이 사회에서의 나는 그 정도의 의미조차 없는지도 모르겠다 싶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면, 밀어냄을 당한다 여겨질 때보다 더 우울해 하곤 했다.


그랬다.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고 그리고  자신은 그저 작디작은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건 어쩌면 진리에 가까운 사실이었다. 그리고  사실을 나는 낯선 프랑스에 와서야 실감하게 되었다.


마음이 이렇다 보니 매일 아침 아이들 등교를 시키려고 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갈 때마다, 아니 하다못해 마트에 장을 보러 간다 할 지라도 깊은 심호흡을 해야 했다. 길거리를 자유롭게까지는 아니더라도, 당당하게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래도 존재감을 갖고 걷기 위해서는 그 정도의 용기와 노력이 늘 필요했다. 그렇게 자꾸만 자존감이 뚝뚝 떨어졌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나는 한국이 더없이 그리웠다.


아니 한국에서의 내가,

나는 이런 사람입니다라고 설명할 수 있었던 많은 근거들이 그리웠다.


직업이나 학력, 경력 뭐 그런 식상한 것은 고사하고, 하다못해 자란 동네라던가, 고향 같은 것, 좋아하는 음악이나, 글 혹은 잊지 못할 음식이나 학창 시절의 추억 같은 것들 말이다.


어학원을 다니고, 프랑스 사람들 틈에 어떻게든 들어가 보려고 노력할 때마다 이상하게도 나를 구성하고 있는 그 모든 경험과 기억들이, 여기에서는 전혀 무용지물이라는 것이 때론 허무하기도 했다.


내가 가졌고 이뤘다 생각했던 그 모든 것들이, 이 사람들과 이어질 어떤 연결의 고리도 되지 못한다는 사실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그것들이 하나도 없을 때의 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나, 그 존재를 생각하곤 했다.



저 사람들이 아무도 몰라줘도

내 인생이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내가 눈길 한 번 제대로 준 적 없어도

봄만 되면 어김없이 길가 어드매 스스로 꽃을 피워낸  작은 풀꽃이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처럼...


그렇게 나는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2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여전히 프랑스어는 어눌하고, 답답한 순간들이 참 많다. 여전히 말만 좀 더 잘해도 내가...! 하고 탄식하거나, 자려고 누웠다 이불킥을 하는 날들도 많다.

 


그러나 그 2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초라함을 견디는 법을 배운 것 같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하고 싶고 보여주고 싶은 욕망이 이글이글 대던 첫 한 해를 지나고 두 번째 해 마저 지나면서,


나는 알게 되었다.


내가 그렇게 나라고 정의 내렸던, 내가 가졌다고 여겼던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어쩌면 내가 끼적인 종이 한 장 같은 건지도 모르겠다고. 그 종이 한 장처럼 약하디 약한 그것을 기대어 살아보겠노라 움켜쥐었던 주먹이 그렇게 슬며시 펴졌다.


어쩌면 내가 누구인지 보다, 그걸 증명하고 보여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장 나답게 살아간다는 그 사실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직도 어설픈 프랑스어로, 그래도 내 몫의 삶을 살아간다는 그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일 것이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여기서의 내 삶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한국에서의 나는... 하던 그 생각을 조금씩 포기하고, 여기에서의 나를 받아들이며 격려하며 살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이 내 속에 깃들기 시작하던 며칠 전 아침이었다.




등굣길에 딸아이의 담임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작은 종이를 내밀며 서명을 해 달라고 했다.

딸아이 반이 곧 소풍을 간다고 했다. 동행을 해 줄 학부모를 구하고 있다고도 했다. 친절하게 또박또박 그는 내게 설명했다. 그리고 나는 무심결에 동행하겠다고 대답을 해 버렸다. 친절한 딸의 담임은 웃으며, 고맙다고 했다. 상황은 그게 끝이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프랑스어도 잘 못하는 나에게 꼭 동행해달라는 의미는 아니었을 것 같았다. 괜히 간다고 했나... 수심이 몰려왔다. 작년 아들이 소풍을 갈 때, 남편이 동행을 했었다. 딸아이는 그걸 무척이나 부러워했었다. 그리고 나는 종이에 동의한다고 적던 그 짧은 순간 딸아이가 행복해할 모습만을 떠올리곤 가겠다고 답을 하고 만 것이었다.



그러나 돌아서니 부끄러웠다.


그 사람들 속에 홀로 선다는 게, 영 자신이 없었다. 괜히 간다고 했다, 이제라도 못 가겠다고 할까, 수십 번도 더 갈등을 했다. 그러나 딸아이는 엄마가 함께 소풍을 간다는 그 말에 환히 웃었다. 그리고 나는 그 부끄러움이 내 몫이라면, 담담히 견뎌야겠다고, 네가 행복하기 위해서 내가 견뎌야 할 내 몫이라면 견뎌내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한 주가 흘렀다.


어제 딸과 함께 다녀온 소풍에서 역시나 나는 큰 도움을 드리지는 못했다.


내 딴에는 한다고 하는 프랑스어가 어린아이들에겐 영 다른 나라 말처럼 들렸던지, 진땀을 꽤나 흘렸다. 그러나 딸아이는 행복해했다. 아이들과 함께 걷던 중에도 옆에 서 있는 엄마가 어찌나 자랑스러운지,  엄마... 하고는 눈을 맞추고, 또 몇 걸음 걷다가는 엄마... 하고는 팔을 꼭 안았다. 나는 내가  부끄러운데, 딸은 내가 자랑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래도 엄마가 와줬다는 사실이 그래도 홀로 있지 않다는 그 사실이 이토록이나 든든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딸아이가 겪었을 고충을 가슴으로 느꼈다.



지난 2년 동안, '그래... 애들이 얼마나 힘들겠어...' 하고 생각했던 날이 참 많았다.

그러나 말이 통하지 않는 친구들 사이에서, 그래도 그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며 살아보려고 무던히 애를 쓰며 마음을 쓰며 견뎌왔을 딸아이의 삶이 이토록 진하게 경험된 건 처음이었다. 괜스레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리고 애를 쓰며 피워낸

딸아이 가슴 속 작은 새싹이 보였다.

부끄럽고, 초라한 그 시간을 이기며

존재해 온 딸아이의 2년의 시간이

애잔하게 가슴에 다가온다.



참 고맙다.

 




따라가길 잘했다고,

부끄러움을 견뎌내길 잘했다고,

도망가지 않고, 숨지 않고,

어설픈 모습 그대로 서서

딸아이의 곁을 끝까지 지켜줄 수 있어서 고맙다고.


그리고 그런 엄마의 모습을, 그 과정을,

엄마의 존재 자체를 자랑스럽게 바라봐준 딸이 너무나 고맙다고...  네가 나보다 더 너른 마음으로 나를 사랑하는구나... 애처로운 마음과 고마운 마음과 감격의 마음이 가슴 가득 차올라...


나는 잠든 딸아이의 모습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함께, 견뎌가야겠다.

부끄러움은 나의 몫, 네가 웃을 수 있기를

네가 견디듯, 나도 내 초라함과 부끄러움을 견디며

네가 자라듯, 나도 너와 같이 자라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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