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어떤 한 사건이 보다 많은 우연에 얽혀 있다면 그 사건에는 그만큼 중요하고 많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우연만이 우리에게 어떤 계시로 나타날 수 있다. 필연에 의해 발생하는 것, 기다려 왔던 것, 매일 반복되는 것은 그저 침묵하는 그 무엇일 따름이다. 오로지 우연만이 웅변적이다. 집시들이 커피 잔 바닥에서 커피 가루 형상을 통해 의미를 읽듯이, 우리는 우연의 의미를 해독하려고 애쓴다.
필연과는 달리 우연에는 이런 주술적 힘이 있다. 하나의 사랑이 잊히지 않는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성 프란체스코의 어깨에 새들이 모여 앉듯 첫 순간부터 여러 우연이 합해져야만 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2014년 2월, 대학교 3학년 시작을 앞두고 있었다. 학과 행사가 많은 과 특성 상 학과 임원들은 맡은 역할이 참 많았다. 선후배 사이가 엄한 분위기라 나는 임원 선배의 후임 지명(?)을 거절하지 못하고 마지못해 수용했다. 사실 나는 3학년 때 부터 임용 고시 준비를 하고 싶었기도 했고, 1학년 때도 2학년 때도 선배들이 무서워 반 강제로 학과 생활에 충실하고 성실했던 나였기에 3학년부터는 조금 자유롭게 지내고도 싶었었다. 내 마음과 상반되는 결정을 내리게 되어 심란하고 복잡한 마음에, 개강 하기 전 훌쩍 어디론가 떠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일단 무작정 숙소와 차편을 예약해 놓은 뒤에 함께 갈 누군가를 찾아다녔다.
하늘도 무심하지, 그 때 따라 이상하게도 단 한 명도 시간 맞는 사람이 없었다. 가족 중에서도, 친구들 중에서도. 평소 같았다면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여행을 취소했을 것이다. 하지만 괜히 오기가 생겼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 하는 심보 였는지,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한 현실에서 쌓인 불만을 여행 일정에 투사라도 하듯 나는 근심의 여왕(엄마)의 만류를 애써 외면하며 혼자라도 여행을 떠날 것이라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여행 가기 전날 밤, 사실은 두려워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혼자 떠나는 여행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장기 매매하는 사람들한테 납치 당하면 어떡하지? 강도를 만나면 어떡하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밤을 꼴딱 샜지만 이제 와서 무섭다고 취소하기엔 자존심이 상했기에 씩씩한 척, 버스를 타고 통영으로 출발했다.
2월 말이었으나 날은 봄처럼 따뜻해 덥기까지 했다. 추울까봐 플리스를 두개나 껴입고 갔는데, 모두 벗어 가방에 꾸역꾸역 넣어 다녔을 정도였다. 의외로 혼자 온 여행객들이 많았고, 날씨도 좋아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여행을 다녔다. 여행 둘째 날은 소매물도에 가기로 계획한 날이었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동행하기로 해서 더욱 든든한 날이었다. 소매물도행 배를 타는 선착장에 유명한 김밥집이 있다고 해서 그곳에서 김밥을 사서 배를 타기로 했다. 맛있는 김밥을 기다리는 동안 김밥집 사장님이 전수해주신 여행 꿀팁도 얻어갈 수 있었다. 그곳에 도착하면 잘 만들어진 관광로를 따라서 걷는 코스가 있는데, 그 옆의 산길로 가면 길이 다소 거칠긴해도 거리도 훨씬 짧고, 경치도 더 좋다는 것이다. 우리 일행은 귀한 정보에 감사를 표하며 들뜬 마음으로 김밥을 들고 배에 탔다.
어둑한 새벽에 일어나 배를 타러 왔기에 아침 잠이 많은 나는 배에 타자마자 잠을 청할 곳부터 찾았다. 선내는 마루 장판으로 되어 여행객들이 누워서 쉬거나 잠을 잘 수 있었다. 마침 우리 일행 세 명이 딱 눕기 좋은 자리가 있어 냉큼 가서 자리를 선점했다. 옆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누군진 몰라도 눕고 보니 좀 가까운 것 같아 얼굴에 후드를 뒤집어 쓰고 팔짱을 껴서 몸을 잔뜩 압축 시키고는 곧바로 잠에 들었다.
두어번 다른 섬에 경유한 뒤 곧 소매물도에 도착한다는 방송을 듣고 주섬주섬 일어났다. 내릴 준비를 할 겸, 섬에 다다르는 바깥 풍경도 감상할 겸 여객실 밖으로 나가보았다. 시원한 바닷바람에 기분 좋게 잠이 깨었다. 그렇게 잠이 깨고 나니 주변을 볼 여유가 생겼다. 어떤 남자가 코트를 입고 내리는 문 근처에 기대어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저 사람도 여기에 내리나?’
궁금해졌다. 왠지 지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그 사람과 같이 내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