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을 졸업한 뒤에,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어느 기업이었는데 내가 그렇게 회사생활과 맞지 않는 사람임은 처음 알았다. 숱한 자해와 자살시도가 있었지만 회사를 그만둘 순 없었다. 가족들과 주변 시선을 의식해서였다. '얼마 다니지도 못할 거 왜 들어간 거야?' '이것도 못 견뎌?' '더 해볼 순 없는 거야?' '사회생활은 원래 다 그래' '다 싫어도 억지로 다니는 거야' '나름 좋은 회사에 들어갔는데 왜 그걸 걷어차는 거야?' '그러려고 석사 했니?'
내가 나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나는 주변에서 저렇게 말할 거라고 생각했다. 심각한 우울이 오래 지속되었다. 자살에 대한 생각도 심했고, 약을 모으고 있었고. 결국 자살시도를 했지만. 회사생활을 10개월이나 버틸 수 있었던 건 계속해왔던 상담 덕분이었다.
내 생애 두 번째 상담은 2년을 지속했다. 자살시도가 있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서 했었다. 선생님은 상담심리사 1급이라고 했다. 상담 경력이 많고 오래되었다고 했다. 선생님은 나를 아픈 손가락이라고 했다. 상담 선생님은 내 우울함의 단계가 심각하니 같이 살고 있는 친언니에게 알려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절대 안 된다고 우겼다. 하다못해 언니의 번호라도 적고 가라고 했었으니.
상담 선생님은 나를 설득하고 설득해서 언니를 상담실에까지 오게 하셨다. 언니는 상담 선생님과 한두 차례 만났다. 너희 자매는 왜 그렇게 잘 우니, 하시더라. 선생님은 언니에게 나의 상태를 설명한 것 같았다. 언니는 내 병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했다. 약을 못 먹을 정도로 우울할 때는 언니가 약봉지와 물을 챙겨주는 날도 허다했다.
엄마는 자주 말을 툭툭 내뱉는다. 가끔 나는 상처를 받기도 한다. 동시에 엄마는 암 환자다. 그래서 난 엄마의 말에 반기를 들 수도 없었고 그저 상처를 나 혼자 감내해야 했다. 엄마한테 대들면 엄마가 스트레스받을 테니까. 엄마를 아프게 하면 안 되니까. 그때 상담 선생님은 자기 개방(상담사가 자신의 얘기를 오픈하는 것)을 해 주시면서, 폭언을 자주 하는 자신의 어머니를 자신이 어떻게 견디는지를 알려주셨다.
"말은 말일뿐이야. 엄마의 밑마음을 보면 돼."
예를 들어보자. 엄마가 '공부 오래 한 것 다 필요 없어'라고 말씀을 하시면, 사실 그 말 밑에 내재된 마음을 보면 된다고. 잘 가르쳐 놓고 학교도 보내놨는데, 제대로 커리어를 쌓지 못해 속상한 마음, 아니 사실 그보다 더. 더욱더. 밑에 깔려있는 마음, 내 딸이 잘 살았으면 하는 마음. 어디든 잘 적응했으면 하는 마음. 내 딸이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그 마음. 그걸 보기 시작했다.
엄마의 말을 그렇게 듣기 시작하니 엄마는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었다. 원래 펜만 잡은 놈들이 사회생활을 잘 못해~ 하며 농담으로 받아치기도 했다. 그러면 엄마가 좋아했다. 상담에서는 내가 엄마로부터 상처받지 않는 기술을 익혔다.
하지만 도저히 직장 상사와 대표님의 폭언은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자살시도와 보호병동 입원으로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리고 선생님은 내 미친듯한 자해, 자살충동을 견뎌내 주셨다. 엄청난 에너지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인 것 같았다. 자살시도를 하고 온 날에는 그 외적 상처를, 그리고 내적 상처를 지그시 어루만져 주셨다. 상처는 잘 치료했는지, 소독은 했는지, 자해를 시도한 도구는 버렸거나 치웠는지 확인해 주셨다. 내 주변인들의 연락처를 받아두셨고, 지금 생각해 보면 나를 그저 지그시 바라보기만 하셨는데도 나는 내 마음을 세심하게 만지는 선생님의 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내 첫 번째 상담은 선생님이 센터를 그만두게 되시면서 종료되었다. 그렇게 자살시도 후, 퇴원 후, 덤으로 얻어진 나의 삶이 시작되었다. 선생님이 그 당시의 나를 부목처럼 견디어 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그렇게 나를 버텨줄 누군가 필요했으니까.
선생님은 늘 그랬듯, 마지막 상담 때도 상담센터 문 앞까지 나를 마중해 주셨다. 나의 새 인생, 앞날을 응원한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