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우유를 잘 못 마신다. 그래서 라떼도 마시면 속이 울렁거린다고 해야 하나, 거북한 느낌이 들고 불편한 감이 있어서 잘 안 마셨다. 제주도에 살 때 몇 달간 목공일로 살아간 적이 있는데 공방일이란 게 아무리 좋은 집진기를 달아도 제한된 공간에서 하루 종일 움직이며 일하다 보면 마칠 시간 즈음엔 목이 칼칼해지는데, 그날은 유독 센딩 작업이 많아 일을 마치곤 뭐라도 시원하게 마셔야겠다는 생각으로 동네 카페를 찾았다.
그 당시에 제주 협재와 금능 중간 정도 위치에 살았는데, 오가며 봐 두었던 '그곶'이라는 카페를 찾았다.
점심에 아메리카노는 마셨고.... "아이스 라떼 한 잔 주세요."
그날 기분 탓인지, 컨디션이 그랬는지.... 뭐 그 자리에서 표현하진 않았지만 천천히 마시며 생각했다.
("원래 라떼가 이런 느낌이었나... 맛있네... 음... 좋다.")
그곶의 아이스 라떼와 치아바타
그날 이후 그렇게 일 마치면 아이스 라떼를 마시러 자주 그곶을 찾았고, 시간 나면 가서 책도 읽고 그림도 그리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그곶를 운영하던 기연씨, 윤정씨와도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게 되었다.
구석자리에서 그렸던 그곶의 실내
물론 카페 그곶이 라떼가 맛있다는 이유만으로 찾지는 않았다.
그때 단골들이라면 다들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 텐데, 매장에 나오는 음악, 다르지만 톤을 맞춘 듯한 집기들과 주인장들의 작은 배려들, 그리고 정성스러운 메뉴 등 카페 그곶의 톤엔 메너를 만드는 유무형의 것들이 편안했고, 무엇인가를 하지 않아도 머무르고 시간을 보내기 좋았던 기억이 있다. 특히나 시간과 계절별로 겨울이면 겨울의 모습으로 여름이면 금능 특유의 생동감이 참 좋았다.
그중 내가 가장 좋아했던 날은 쌀쌀하고 비가 오는 점심 즈음 창가 자리에 앉아 멍 때리는 시간들이었다.
서울로 돌아와 책으로 만난 그들의 이야기
그 시절 남는 시간에 유화를 그려 팔고 그랬는데, 기연 씨의 제안에 그곳에서 작은 전시회를 열었던 기억도 나고, 일 마치고 금능해변에 앉아 마시던 맥주도, 마감 도와주고 시내로 국수 먹으러 가던 것도 여러 장면들이 지금 생각해보면 큰 추억거리 중 하나이다.
처음 금능의 그곶을 작은 엽서에 그렸던 것처럼, 수원리로 옮겨 오픈한 또 다른 그곶도 그려 보았다.
돈벌이가 넉넉하진 않았지만, 긴 회사생활과 사람에 지쳐있던 나에게 휴식과 동기부여, 건강을 선물해 주었던 제주의 시간 그리고 그곶의 공간과 사람들.
제주 수원리 카페 그곶을 담은 그림들.
수채화 작업 조용하고, 아늑했던 수원리 그곶의 자리
원래 창밖은 나무와 밭이 보이는 풍경이었지만, 까만 밤 별이 쏟아질 듯 보이는 제주의 하늘을 넣고 싶었다.
차분한 공간, 정감 있는 가구와 편안했던 조명, 음악.
글을 쓰고 있으니 빨리 다시 방문하고 싶다.
내가 선물해 주었던 포스터 박스와 아기자기한 물건들
그곶을 담는 재료로는 수채화가 참 잘 어울릴거라 생각했다.
색과 물을 덧대면 비치고 겹치며 풍부함을 더하는 그 맛처럼
그곶의 비밀공간 Friends and Family 포스터가 무심한 듯 잘 어울렸다.
우측으로 보이는 저 긴 의자는 교회 이외의 장소에서 본 건 예비군 훈련 이후에 처음인데, 카페에도 이렇게 잘 어울릴 수 있다니.
바쁜 일상을 지내다 고요해지는 순간 지친 몸과 정신을 치유하기 위해 모든 걸 내려놓고 떠났던 제주에서의 삶이 지금도 가끔 생각난다. 제주에 카페가 넘쳐나고 집값도 오르고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지만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면, 몇 년 후에도 비오는 오후 그곶 창가에 앉아 아이스 라떼를 마시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