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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우 Sep 20. 2022

"솔직히 자기 편하려고 애 안 낳는 거 아니냐."

Photo by Mike Erskine on Unsplash


예전부터 저출생 현상과 관련해 일부 사람들이 하는 말 중 이해하기 어려운 게 있었다. "솔직히 자기 편하려고 애 안 낳는 거 아니냐." "이기적으로 혼자 편하게 살려고 그러는 거 아니냐." 같은 류의 말이었다. 저출생 관련 어느 기사를 봐도 이런 댓글이 반드시 있었다. 일단, 이상한 건 왜 편하게 살면 안되느냐는 것이었고, 두번째로, 왜 그걸 나쁘게 생각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다 최근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 이유는 과거의 많은 사람들이 마치 강요받듯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고통을 짊어지며 살았다는 점이다. 스스로 원치 않음에도 그런 삶에 떠밀려 살았고, 그래서 피해의식이 생긴 것이다. "나도 고생했으니 너도 고생해야 한다."라는 생각이 없다면, 그런 말이 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당연하게도 사람은 편하게 살고 싶으면 편하게 살아도 된다. 혹은 편함과 다른 종류의 행복이나 성취를 얻고 싶다면 그렇게 살면 된다. 그것에 대해 옳다 그르다, 할 건 못된다. 오히려 청년 세대가 그렇게 아이를 낳고 키우길 바란다면, 모범을 제시해야 한다. 결혼과 육아가 고생이나 고통이 아니라, 행복이나 소중한 경험이라는 걸 모범으로 증명하여 보여주면 된다. 


사실, 지금의 저출생은 그런 '증명의 부재'에서 오는 면이 크다. 많은 어른들, 주위 이웃들, 일가 친척들은 결혼하여 부부가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는 것이 이상적인 행복이라는 걸 별로 보여주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어린 시절 경험도 행복 보다는 고통과 패배로 점철되어 있다고 느끼는 청년이 많다. 


청년들은 기껏 결혼아고 아이를 낳아봐야, 자신이 봤던 어른들처럼 부부는 서로 무심해지고, 불행해지고, 사랑하지 않게 될 거라고 먼저 두려워한다. 아이를 키워봐야, 자신이 경험했던 것처럼 입시 지옥에서 경쟁하고 스트레스 받으며 불행한 어린 시절이나 보낼 것이라 짐작한다. 그 모든 경험을 뚫고 결혼과 육아에 뛰어들려면, 초인적인 용기라도 필요한 상황이다. 


실제 현실은 어떨까? 부동산 폭등 시장에서는 신혼 부부들이 아파트를 제때 사지 않았다며 다툰다는 기사들이 넘쳐난다. 이제 벼락거지가 되었다면서 말이다. 반대로, 부동산 폭락 시점에서는 신혼 부부들이 영끌로 고점에서 아파트 사서 절망에 빠졌다는 기사들이 넘쳐난다. 여전히 주택값은 청년 세대가 부담 가능한 수준이 아니다. 10년 전 서울의 아파트가 평균 연 소득의 10배 정도였다면, 지금의 20배 가까이 된다. 현실은 더 가혹해졌다. 


육아는 어떨까? 중고등학생 자녀 1인의 교육비는 평균 1년에 1000만원 가까이 된다. 1000만원이면, 매년 샤넬 가방이나 롤렉스 시계를 하나씩 사도 되는 수준이다. 그렇게 천문학적인 수준의 돈을 들여가며 아이를 키우면 결과는 어떨까? 소수만 살아남는 경쟁은 둘째치더라도, 성인이 된 이후 어릴 적부터 시달렸던 입시나 가정불화 트라우마 등으로, 부모와 멀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심지어 한국 2030 여성의 직업 중도 탈락 비율은 OECD 최고 수준이라고 한다. 출산과 육아를 위해 직장을 포기하는 비율이 매우 높다. 그 입시 지옥을 통과하며 자기 삶이 가장 중요하다고 교육받은 세대가 육아로 인해 포기해야 할 대가가 너무 크다. 그 포기는 누군가에게 어린 시절, 입시 시절, 취업 준비 시절 등 인생 전체에 대한 포기와 다르지 않다. 


이렇게 만들어놓은 사회와 문화 안에서, 역사적으로 거의 유례 없는 세계 최저의 저출생국가가 탄생한 건 당연한 셈이다. 이 시대의 현상은 불행해지지 않기 위한 당연한 귀결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사실 이 시대의 거의 모든 문제적인 현상은 '불행해지지 않기 위한 최후의 선택'처럼 읽히는 면이 있다. 불행을 반복하지 않기 위한 개개인의 선택들이 쌓여서 지금의 사회를 만든 것이다. 


이기적으로 살지 말고 고생하라, 자기만 생각하지 말고 불행하라, 자신만 편하려고 하지 말고 고통을 짊어지라, 이것이 우리 사회 또는 기성세대가 청년 세대에게 요구하는 메시지라면, 이는 피해의식의 대물림과 다르지 않다. 차라리 필요한 건 경험의 단절이다. 피해의식 안에서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 그저 새로운 시대를 투명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 시대는 눈이 부시다. 가뭄으로 메말라버린 땅에 최후의 물웅덩이를 찾아 모인 물고기떼의 비늘에 비친 빛처럼, 눈이 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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