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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우 Oct 13. 2022

ai 시대의 글쓰기

Photo by DeepMind on Unsplash


최근 AI의 일러스트 생성 능력이 화제가 되고 있다. AI에게 어떤 그림을 그려달라고 주문만 하면, 매우 근사하게 그림을 그려내어 이제 일러스트레이터라는 직업이 점차 사라질 거라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알파고로 인해 이미 바둑 업계는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다는 모양이고, 차차 작곡, 시나리오 등의 영역까지 AI가 정복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회계사, 약사, 의사, 변호사, 판사 등 전통적인 전문직 영역도 AI 발전에 따라 위협받는 순위가 매우 높게 책정되곤 한다. 이미 특이점이 왔다는 사람들도 있고, 아직은 아니라는 사람도 있지만, 향후 몇 십년 안에 인간의 상당 영역에 AI가 개입할 것은 명백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개개인의 고유성을 지키면서 자기만의 일을 가질 것인지도 고민해야 할 것 같다. 

하나 생각하는 건, 아무리 AI가 발달하여 소설, 시나리오, 시 같은 것을 기막히게 써내더라도, 결코 대신할 수 없는 글쓰기 영역도 있다는 점이다. 그건 개인이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는 영역이다. 아무리 AI더라도, 신이 아닌 이상 내 인생과 마음의 모든 이야기를 다 알 수는 없다. <트루먼쇼>처럼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촬영하여 내 삶을 파악하고, 내 심리를 추정하여 AI가 이야기를 써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일은 윤리적으로도 불가능할 것이다. 결국 내게는 나만 아는 '나의 이야기'가 최후로 남게 된다.

AI가 거의 모든 전문적인 영역을 대체하더라도, '나' 또는 '나의 삶'을 대체할 수는 없다. 물론, 극단적인 감시 사회나 빅브라더 사회를 상정하면, 결국에는 '나'조차도 AI의 통제에 따라 만들어지고, 나의 이야기조차 AI가 쓰는 사회도 있을 수 있겠으나, 아마 가장 마지막에 도래할 AI 지배사회일 것이다. 그때까지는 여전히 나, 나의 삶, 나의 이야기는 남아 있는 셈이 된다. 마치 데카르트가 악마가 모든 것을 속여도 '나의 존재' 만큼은 속일 수 없다고 이야기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기술이 극단적으로 발전하는 이런 시대일수록,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점점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 나 이외의 모든 것을 AI가 대체하는 시대가 오더라도, 나는 대체될 수 없기에, 나를 이야기하는 문화는 점점 더 강성해질 것이다. 이미 모두가 '나'에 관해 표현하고 이야기하는 시대이지만, 이런 시대상은 점점 더 심화되지 않을까 싶다. 

나는 글쓰기에 관해 이야기할 때, '나의 가장 깊은 곳'에는 '타인'이 있다고 말해왔다. 우리의 마음은 마치 지하수처럼 이어져 있어서, 각기 다른 지점에서 파내려가도, 결국 맨 아래에서는 만난다고 말이다. 내 삶의 가장 깊은 이야기들, 슬픔, 아픔, 소외감, 박탈감, 생생한 기쁨, 희열 같은 것들은 동시에 타인들도 경험하는 순간들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가 나에 관해 진정으로 이야기하면, 그것은 다른 모든 사람에 대하여, 서로가 공감할 수 있는 그 무언가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뜻도 된다. 

그러니까, 이 기술 압도의 시대, 우리가 할 일은 나에게 집중하는 것이다. 나에게 집중하면서, 그 안의 다른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가 닿는 일이다. 그 일에는 끝이 없을 것이다.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우리는 나를, 서로를, 인간의 가장 깊은 마음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AI가 나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자전적 에세이를 써줄지 모를 그날까지, 우리는 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그렇기에 자기 이야기를 전하는 에세이야말로 '최후의 장르'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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