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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우 Sep 01. 2022

신조어 '누칼협'과 각자도생의 시대

Photo by Kanchanara on Unsplash


최근 온라인에서 '누칼협'이라는 신조어가 널리 퍼지고 있다. 누칼협이란 "누가 칼 들고 협박했냐"의 줄임말이다. 뉴스나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누군가가 자신이 한 선택에 대해 절망이나 실망, 억울함을 표시하면 "누가 칼 들고 그러한 선택을 하라고 협박하기라도 했냐"고 댓글을 다는 식이다. 대표적으로, 코인이나 주식 투자에 실패한 사람들 이야기에 이런 반응이 많다.


요즘에는 고점에서 아파트를 매수한 사람들에 대해 같은 반응들이 나온다. 누가 칼들고 아파트 사라고 협박이라도 했냐는 것이다. 그외에도 직업적 어려움에 대한 호소, 결혼이나 육아의 선택 등에도 비슷한 반응이 나온다. 누가 공무원 하라고 했냐, 누가 애 낳으라고 했냐는 것이다. 


그 모든 건 본인의 선택이니, 그에 따른 좌절도 모두 자신이 책임지고, 죽는 소리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선택'이 얼마나 전사회적으로 하나의 시대정신이 되었는지 보여준다. 선택은 전적으로 선택한 사람의 책임이니, 선택이 실패했다면 조롱당해 마땅하다.

 

원칙적으로는 개개인이 인생에서 자신이 한 선택에 대해서는 자기가 책임져야 하는 게 맞다. 특히, 위험 부담이 큰 재테크 등에서는 큰 손해를 봤다 하더라도, 다른 누가 책임져줄 수는 없다. 그러나 실제로 이를 누군가가 책임지냐 아니냐의 최종적인 책임소재를 떠나서, 그러한 선택으로 인한 좌절에 '공감'하거나 '이해'하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다. 우리는 '당신 자신의 책임'이라고 말하면서도, 그 선택에 따른 어려움에 공감하고 함께 고민할 수도 있다.


누구도 살아가면서 완벽한 선택만 하며 살아갈 수는 없다. 아파트를 사지 않으면, 당장 나만 벼락거지가 될 거라는 불안감과 초조함에 휩싸여 매수 선택을 했을 때, 그 선택에는 분명 이해하고 공감할 여지가 있다. 사실, 우리 모두 그런 불안과 초조를 껴안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좌절감을 호소하는 사람에게 비아냥거리는 것 외에 다른 방식도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최근 우리 사회의 분위기는 서로에 대한 무한한 비난과조롱이 일상화된 것처럼 보인다. 각자도생이 심화될대로 심화되어, 모든 것은 개인의 선택과 책임으로만 환원되고 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 처한 당신을 비난하거나 조롱하고 심지어 혐오해도 되는데, 그 모든 게 당신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선택은 오로지 나의 탐욕이나 이기심, 어리석음 때문만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내몰린 상황, 강요된 불안, 수많은 방향에서 누적된 두려움과 압박 속에서 이루어진다. 


Photo by CHUTTERSNAP on Unsplash


그렇게 보면, 때로 어떤 선택은 누가 칼들고 협박하진 않더라도, 내 마음 속에 가해지는 엄청난 압력들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럴 때의 압력은 그 자체로 칼이 되기도 한다. 주위 사람들이 모두 결혼하기 시작하면, 불안감에 적당한 사람과 결혼을 서두를 수도 있다. 나 빼고 모두 빚내서 재테크에 뛰어들면, 나만 그 자체로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있는 것 같이 느낄 수 있다. 부모님이나 주위 어른들이 공무원만 답이라고 강조하면, 어쩔 수 없이 공무원 학원으로 향하고 있을 수 있다. 그 모든 게 오로지 개인의 '의지' 문제만은 아니다.


물론, 정부의 지원 정책 같은 것들이 '특정 선택의 좌절'만을 옹호한다면 그에 대한 비판은 충분히 가능하다. 가령, 5억 빚을 내 아파트를 산 사람들만을 구제하겠다는 것은, 애초에 5억 빚을 낼 여유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또다른 차별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비판과는 별개로, 우리는 세상의 수많은 선택과 실패에 대해 관대함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건 나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삶에서는 나 자신의 선택을 스스로 용서해야만 하는 순간이 반드시 있다.  


내가 그 누군가의 좌절에 대한 공감과 이해를 섣불리 걷어찬 그 발길질은, 돌고 돌아 나에게 돌아올 수밖 없다. 결국, 그런 발길질 한 번마다 우리는 더 그런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사회에서는, 이제 더 이상 서로에 대한 공감과 이해, 공존의 여지 같은 것은 없이, 오로지 홀로 벌벌 떠며 선택하고 모든 걸 끌어 안아야 하는 각자도생만이 남을 것이다. 


"아마 적당한 선이 있을 것이다. 자신의 선택에 대해 온전히 책임지면서도, 자신과 타인의 선택에 대해 관대하게 이해할 수 있는, 적절한 지점이라는 게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가 그 지점을 발견하고 놓지 않았으면 싶다." (<내가 잘못산다고 말하는 세상에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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