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는 자발적인 스트레스와 비자발적인 스트레스가 있다고 한다. 자발적인 스트레스는 우리의 뇌를 깨우고, 활력 있게 하며, 우리가 더 강인해지고 성장하도록 돕는다. 반면, 비자발적인 스트레스는 실제로 건강에 심각한 해를 끼칠 뿐만 아니라, 삶을 우울하고 짜증스럽게 하며, 힘겨운 부담으로 삶 자체를 내려 앉혀서 생기를 잃게 한다.
결국, 좋은 삶을 위한 원칙은 간단하다. 자발적인 스트레스를 늘리고, 비자발적인 스트레스를 줄이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삶을 가능한 한 능동적인 경험들로 채우고, 수동적인 압박이나 부담들은 피해야 한다. 비자발적인 스트레스는 실제로 우리 몸에 암세포들을 만들어내듯 우리 삶을 안쪽부터 갉아먹을 것이다. 그렇기에 스트레스는 내가 자발적으로 하는 경험에서 오는 것, 내가 원해서 하는 모험이나 도전에서 오는 것으로 가능한 한 채울 필요가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인생을 그런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경험으로만 채운다는 건 불가능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비자발적이고 수동적인 의무에 묶인 채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삶의 부분들이 너무 많을 수도 있다. 그럴 땐, 내가 처해 있는 이 비자발적인 것들이 자발적이라고 믿고 뇌를 '속이는' 일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뇌를 속여서, 이 강제적인 상황을 능동적인 상황이라 믿게 하는 것이다.
고전이 된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유태인 수용소 생활을 '게임'이라고 속이는 장면이 나온다. 어린 아들은 아버지가 준 상상력으로 극도의 스트레스 상황을 재밌는 놀이로 경험한다. 마찬가지로 영화 <행복을 찾아서>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부랑자 생활을 하게 된 아버지와 아들이었지만, 아버지는 어린 아들에게 지하철에서 노숙해야 하는 일을 공룡들이 있는 세계에서 숨는 게임이라고 속삭인다. 그러자 어린 아들은 지하철 소리를 공룡 소리라 믿으면서, 노숙 생활을 재밌는 이벤트로 받아들인다.
실제로 삶의 여러 국면들을 그런 게임이나 소설처럼 받아들일 수도 있다. 가령, 나는 이 한 편의 소설 같은 인생에 던져진 한 명의 주인공이라 믿는 것이다. 내가 나로부터 거리를 두고, 나를 한 명의 등장인물로 바라본다. 이 등장인물은 RPG 게임을 하듯이 레벨을 올리고 돈을 모으고 길드나 가족을 만든다. 그렇게 인생에서 고된 시절을 게임 속에서 사냥하고 광물 캐는 일이라 믿어볼 수도 있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삶을 길게 보고, 하나의 기나긴 서사시로 바라볼 수 있을 때, 삶을 '자발적인 것'으로 경험하게 되지 않나 싶다. 인생은 매일을 들여다보면, 끝없는 반복이나 매너리즘의 연속이다. 매일 노동하고 밥 차려 먹고 걱정하며 변치 않을 것 같은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멀리서 보면, 모든 인생이 서사시에 가깝다. 모든 인생이 드라마이고, 모든 인생에 흥망성쇠가 있으며, 성장의 서사가 있고, 누구나 실패를 하기도 한다. 결국 한 걸음 물러나서 삶의 서사를 그릴 수 있게 될 때, 우리는 자발적인 스트레스를 얻지 않나 싶다.
3년간 해야하는 수험생활은 약 1100일간의 고통의 나날일 수 있다. 그러나 멀리서 바라보면, 3년간 레벨업 하는 과정이나 성장서사에 필수적인 정도의 고행으로 볼 수도 있다. 5년간 다녀야 하는 직장은 매일이 달라지지 않는 출퇴근과 노동의 연속일 수 있지만, 돈을 모으고 자기만의 계획을 건설해가는 또다른 서사로 바라볼 수도 있다. 약간 멀리서 보면, 나쁜 스트레스가 좋은 스트레스로 변모할 수도 있다. 그 약간 멀리서 보는 자아를 잘 유지하면 유지할수록, 삶이 살아날 수 있다.
인생의 모든 문제가 태도에 달려 있지는 않겠지만, 태도가 해낼 수 있는 것들도 분명히 없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태도의 힘, 달리 말해 상상력이나 관점의 힘을 믿고 있다. 사실, 그 힘을 믿지 못하면 하루도 제대로 살 수 없을지 모른다. 그 힘을 기억해야만, 오늘 하루도 조금은 덜 엉망인 채로 견뎌낼 수 있을 것만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