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함께 했던 대담 자리에서 김정주 작가는 '기도'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는 벽에서 물이 콸콸 새고 있는데, 가만히 앉아서 기도만 하고 있으면 일시적으로 위안은 얻을 수 있겠으나 물이 새는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기도만으로는 현실의 모든 게 해결되지 않으므로, 현실을 현실대로 올바로 직시하고 제대로 해결해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새는 물'을 막을 용기에 관해 생각했다. 이를테면, 기도란 그 물을 막기 위한 용기를 달라고 해야하는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만약 그 방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물을 막을 용기가 없어 눈을 감고 기도만 하고 있을 때, 누군가는 벽에서 새는 물을 똑바로 응시하며 내가 달려가 저 물을 막을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할지도 모른다. 아마 그가 진정한 기도를 행하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아마 그 이야기를 사회 전체로 바꾼다면, 사회에 새는 '구멍'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사회의 구멍이란, 일종의 차별, 불평등, 부당함 같은 것들이 될 것이다. 모두가 자기를 위해 기도하고, 사회의 문제에 대해 회피하고 있을 때, 누군가는 그 구멍을 응시하며 용기를 달라고 기도할 것이다.
김정주 작가와 함께 했던 대담 자리에는, 허태준 작가도 함께했다. 우리는 청춘 시절의 글쓰기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그 시절의 글쓰기란 어떤 '반항'에 초점이 있었다는 데 모두 공감했다. 허태준 작가는 청년 노동자에 대한 글을 썼다. 사회가 호명조차 하지 않는 청년들이 존재한다는 것에 관해 이야기했다. 김정주 작가는 세상의 낙인이나 편견과 싸웠다. 목회자의 가난, 교회에서의 선입관에 관해 썼다. 나도 그 시절 청년으로 살아가는 일과 우리 사회의 차별, 증오, 분노에 관해 쓰고자 했다.
지금에서 생각해보면, 그런 글쓰기에는 나름대로 젊은 날의 용기랄 게 있지 않았나 싶다. 지금에도 그런 용기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적어도 스스로의 자기 방어나 자기 합리화랑 싸우는 일은 게을리하지 말아야겠다고 자주 생각한다. 인간은 너무 쉽게 회피하고, 너무 쉽게 자기 합리화에 빠져 들어서, 진짜 문제랄 것을 너무 자주 놓치고, 그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할 만큼의 용기를 낸다는 게 참으로 쉽지 않은 듯하다.
목회자이기도 한 김정주 작가는 기도도 좋지만 결국 현실은 그와 별도로 잘 '빌드업'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 말에 아주 공감해서, 나도 내 삶이 위로나 위안, 회피에만 머물지 않기를 바랐다. 삶에는 위로나 위안이 필요하지만, 동시에 현실을 쌓아나가는 힘과 현실을 직시하고 나아가 더 넓은 현실에 반항하는 일도 필요하다.
그러니까, 나에게 기도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언제나 용기에 관한 일일 것 같다. 나를 이겨낼 용기, 이 다음을 믿을 용기, 현실을 직시할 용기, 현실에 맞설 용기가 언제나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