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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우 Dec 28. 2022

모든 게 엉망진창인 것 같을 때

Photo by Julian Hochgesang on Unsplash



살아가다 보면, 어느 날 오후의 햇빛 아래에서 내 삶의 모든 게 엉망진창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이 창백한 햇빛이 너무도 부담스럽게 내 삶의 구석구석을 비추는 것만 같다. 나를 이루고 있는 모든 관계, 나의 모든 일, 내가 애써 지키고 있는 이 자아까지 다 재활용품 수거장에 놓인 찌그러진 패트병들만도 못하다고 느껴진다. 어른이 되어가는 일이란, 그런 마음을 견디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와 비슷한 마음으로는, 이 삶의 모든 것을 더 이상 짊어질 수 없을 것만 같은 마음이 있다. 내 등에 쌓인 짐이 너무 무거워서,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어버린 다음에, 그냥 다 놓고 도망가버리고 싶은 마음이다. 그러나 역시 어른이 되어가기 위해서는, 그런 마음도 견뎌야 한다. 


청년 시절에는 나의 모든 게 엉망인 것 같으면, 삶을 '리셋'하면 되었다. 사람도 정리하고 내 안에 웅크려서 책만 읽고 영화만 보며 한 시절을 보내고 나면, 조금씩 내가 괜찮아지는 때가 왔던 것 같다. 마찬가지로, 도망치고 싶을 때는 도망치고 떠나도 되었다. 휴학을 해버리거나, 여행을 떠나고, 고향에 피신을 가서 강아지들을 쓰다듬었다. 


그러나 이제는 나의 모든 게 엉망인 것 같고 도망치고 싶어도, 나는 다음 날 또 출근을 해야하고, 자아를 갈아끼운 다음에는 내게 주어진 일들을 해야한다. 그래야 통장에 들어오는 돈으로 아이 학비도 내고, 공과금도 내고, 대출 이자도 갚을 수 있다. 그래서 이제는 이 모든 걸 유지하면서도, 그 마음을 이겨내는 법을 계속 배워나가야 한다.


흥미롭게도 그런 마음을 지니는 데 가장 좋은 건 습관이다. 마음을 강인하게 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대단한 결심, 각오, 용기 같은 것이 필요할 것 같지만, 사실 더 도움이 되는 건 그저 습관인 것 같다. 견뎌내는 마음과 이기는 마음, 꺾이지 않는 마음을 지니기 위해서는 하늘로부터 정기라도 부여받거나 을지문덕의 영혼이라도 소환해야 할 것 같지만, 사실 진짜 필요한 건 그냥 습관이 아닌가 싶다.


그저 매일 아침 일어나 정해진 루틴에 따라 옷을 입고, 양말을 신고, 아이에게 우유 한 잔 먹이고, 아이랑 손잡고 나가 유치원 봉고차를 기다리고, 지하철에 타자마자 전자책을 읽는 이 루틴이 삶을 지켜준다. 지하철역에 내려서는 빵을 하나 사들고, 회사에 가서 커피 한잔을 마시고, 아침을 시작하면서 회사 메일을 여는 일을 매일 하면, 하루의 마음이 올라온다. 동료들과 점심을 먹고 자리에 돌아와 앉으면, 오후 종일 일할 수 있다. 기분이나 마음은 습관 앞에서 말 잘 듣는 새 나라의 어린 아이가 된다.


내가 밤마다 매일 글을 쓰는 것도, 사실은 그저 어떤 형식을 유지하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음에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죽고 싶거나 도망치고 싶거나, 괴롭거나 기쁘거나 매일 글을 쓰는 일은 내가 내 삶에 대한 통제권을 완전히 놓치고 있지 않다는 느낌을 준다. 나는 내 마음에 굴복하는 어린 아이가 아니라, 내 마음을 나의 형식으로 이끄는 어른이라는 것을 조금은 느끼게 해준다. 


그렇게 창백했던 오후는, 잘 완수한 하루의 끝에서 차분한 어둠으로 뒤덮인다. 내가 알기로, 마음을 진정으로 이기게 해주는 건 매일의 습관이다. 매일 아침이 오듯 책을 읽고, 매일 밤이 오듯 글을 쓰면, 그럭저럭 이 삶을 살아낼 수 있다. 그렇게 어른이 되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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