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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우 Jan 03. 2023

쌓아나가는 삶

Photo by Scott Webb on Unsplash



스무살 무렵부터, 나는 매일 무엇을 쌓고 있는지 확인하는 버릇이 있었다. 이번 달에는, 올해는 무엇을 쌓았는지 강박적으로 기록하곤 했다. 특히, 이십대에는 그런 습관에 절실하리만치 의지하기도 했다. 나는 대학교 졸업할 무렵, 사실상 취업 자기소개서에 쓸만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토익 점수 하나, 자격증 하나, 대외활동 하나 없었다. 


그 이유는 내가 살고 싶었던 건 오직 작가로서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가로 살려면, 당시 내가 생각하기에, 책을 많이 읽고, 많이 쓰고, 좋은 것을 많이 보고, 경험하는 게 중요했다. 그래서 항상 독서 기록을 쓰고, 내가 본 모든 영화를 기록해두고, 매년 얼만큼의 글을 썼는지 헤아려보고, 어떤 경험들을 했는지 확인하곤 했는데, 당연히 그 모든 건 흔히 말하는 '스펙'은 단 한줄도 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미래로 가는 데 있어서 의지할 건 확실히 그런 것들 밖에 없었다. 스스로 무언가 쌓아나간다고 믿지 않으면, 도저히 청춘의 불안을 견뎌낼 수 없었다. 그래서 스펙 하나 없었던 나는 대신 무엇을 '쌓고 있는지'를 계속 기억해야 했다. 쌓고 있는 게 없는 불안을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내 안에 차곡차곡 쌓아간다는 것, 나만의 방식으로 어떤 보물창고의 보물들을 늘려간다는 것, 이 축적에 대한 믿음, 내가 쌓고 만드는 나만의 삶에 대한 의존이 내가 살아온 방식이었다. 이제 그 방식은 완전히 내 삶이 되어버렸다. 나는 거의 매일을, 매주를, 매달과 매년을 그렇게 무언가를 쌓아간다는 마음으로 살아간다. 


어느 때 쌓아나가는 건 독서 목록이다. 나는 내가 읽은 책들 만큼의 세계를 알게 된다고 생각하고, 그 세계가 내 것이 된다고 생각한다. 어느 때 쌓는 건 글이다. 내가 나의 언어로 쓴 나의 글들만이 진짜 나의 지식이자 가치관이 된다고 믿는다. 어느 때 쌓아올리는 건 사람과의 만남이다. 내가 만난 사람들이 내 삶의 지평을 열어주고, 앎과 희망을 알게 해준다고 느낀다. 


그렇게 내 안의 무언가를 끊임없이 쌓아나간다는 게 내 삶을 지탱한다. 내가 이 무형의 인생에 어떤 모양을 만들어간다고 느끼게 해준다. 그런 쌓아올림은 내가 내 삶에 속해 있다는 확신을 준다. 세상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변해가지만, 나는 내 삶만의 무언가를 계속 만들어가는 여정에 속해 있다는 감각을 이어가는 것이다. 내가 내 삶에 속해서 내 삶의 보물을 쌓아가고 있다는 이 느낌이 내 삶을 지탱해왔다. 


이렇게 내 삶을 구축하는 여정은, 누군가와 경쟁하는 일도 아니고, 제로썸 게임을 하는 일도 아니다. 그저 내 삶을 살고자 하는 하나의 방안이고, 조금 더 스스로 단단해지고자 하는 노력 같은 것이다. 가령, 어느 섬에 던져지더라도 잃지 않을 내 안의 무언가를 만들어간다는 그 믿음이 삶의 중심을 형성한다는 생각이 든다. 바로 그걸 지키고 쌓아가야 하는 것이다. 


나아가 그런 여정을 이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 그것이 넘쳐나듯 세상과 나를 이어준다고 느끼곤 한다. 어느 순간, 삶이 열리고 넘쳐 나오면서 세상과 이어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계속 내 안에 무언가를 쌓아올리는 여정은, 그만큼 많은 것들을 내 삶 밖으로, 세상으로 쏟아내면서 세상과 나를 만나게 한다. 바로 그 순간에야말로, 내가 진짜 원하는 만남, 내가 진짜 원하던 종류의 세상이 있다는 걸, 나는 조금은 깨달으면서 삶을 살아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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