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을 심플하게 이해해보는 한 가지 방법이 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게임 속 캐릭터라고 한 번 생각해보는 것이다. 게임 속 우리는 열심히 사냥을 하고, 일을 하고, 돈을 벌고, 물건을 사고, 집을 짓고, 레벨 업을 하며 살아간다. 그러다 게이머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멀뚱멀뚱하게 황야에 서서 잠시 생각한다.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거지?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살고 있는거지?'
그러나 게이머가 다시 돌아오면, 우리는 또 기계마냥 열심히 사냥하고 일하러 다닌다. 하지만 문득문득 '공백의 순간'들이 있다. 게이머가 자리를 비운 순간, 우리는 잠시 나의 이 자동 기계같은 삶에 대해 돌아본다. 내가 욕망하는 아이템, 레벨업을 원하는 나 자신, 집을 짓기를 꿈꾸는 나, 퀘스트를 수행하는 걸 추구하는 나의 모습, 이런 것들이 과연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인지, 나는 내 삶의 진짜 주인이 맞는지, 의문을 느낄 수 있다.
우리가 상징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게임 속의 캐릭터로 살아간다는 의미와 유사하다. 상징계의 끊임없는 퀘스트들을 쫓아서, 상징계가 만들어놓은 욕망들을 따라서 사는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이 상징계 '바깥'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눈치챌 때가 있다. 그러나 바깥으로 나갈 수는 없다. 게임 캐릭터가 인간계로 나오는 건 애당초 불가능하다. 인간도 상징계 밖을 나갈 수 없다.
그러나 만약 그러한 상징계의 욕망, 우리에게 강요되는 온갖 퀘스트들, 마치 기계처럼 따르고 있는 이 세상의 법칙을 '넘는 것'과 비슷한 가능성이 있다면, 이 상징계를 조금씩 비틀어보는 것이다. 나는 마법사 캐릭터로 태어나서 마법으로 사냥하며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지만, 다른 마법사와 달리 마법으로 약을 만들거나 힘을 강화하는 데 써보는 것이다. 혹은 아무 의미없는 놀이에 마법을 써볼 수도 있다. 인간 삶의 고유성은 그런 식으로 얻을 수 밖에 없다. 즉, 상징계 안에서 '차이를 생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차이를 생산'하는 힘은 어디서 올까? 바로 내가 게임에 속해 있다는 '인식'이다. 즉, 나는 그냥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게임의 법칙에 따라 살 수밖에 없기에 그 속에 빠져 사는 게 아니라, 그 법칙에 '관여'할 여지가 있다는 인식을 깨닫는 것이다. 이것이 상징계 혹은 현실원칙과 대면하면서 그것을 중지시킬 수 있는 '힘'이다. 이 힘은 게이머와의 접촉, 즉, 게이머 입장에 서서 캐릭터를 바라보기라는 인식적인 관점에서 만날 수 있다.
우리는 현실 밖으로 나갈 수 없다. 현실 밖은 황야에 불과하고, 그곳에서 우리는 광기에 사로잡힌 채 자신을 잃고 살 수밖에 없다. 결국 우리는 현실 안에 있되, 현실을 '타자'로서 마주하고, 그 속에서 '차이를 생산'하면서 내가 속한 상징계에 일정한 '균열'을 만들어가고, 나만의 고유한 삶을 생산해가야 한다. 진정한 삶은 '저기 너머 어딘가'에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속한 지금 여기에서의 나(내 삶의 패턴과 형식과 욕망)를 비트는 데부터 있는 것이다.
적어도 이것이 내가 라캉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한 방식이다. 그리고 라캉을 좋아하는 이유는, 여기 너머의 진정한 무언가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의 삶을 비틀면서 나아가야 한다는 그 현실주의 때문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욕망 그 자체를 마주해야 한다. 소비사회의 욕망, 집단주의 체제의 욕망, 타인들의 욕망, 유행하는 욕망 같은 것들을 마주하면서, 그것들에서 나를 건져내어 그것과 '차이가 있는' 나의 삶을 '생산'하면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나만의 삶을 사는, 니체가 말한 '자기 자신으로서 사는' 방법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