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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우 May 25. 2023

육아의 이유

Unsplash의Omar Lopez



매일 아침 아이의 유치원 가방을 싸고, 어린이용 작은 수저를 닦고, 옷을 입히고, 벌린 입 구석구석 이를 닦아주고, 머리를 감기고, 몸을 닦이고, 한글을 가르치고, 함께 축구를 하고 땅을 파면서, 이 모든 게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동시에 생각한다. 이 애씀, 이 정성에는 내게 돌아올 현실적인 이익이랄 게 없다. 그럼에도 온 마음을 담아 이 어린 존재를 챙기는 것은 그저 사랑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닌 다른 존재를 위해 그저 애쓸 수 있다는 이 경험은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이 사랑의 행위는 어딘지 논리를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아이가 잘커서 나를 부양해주기를 기대한다든지, 아이를 성공시켜 대리만족을 하고, 자식 잘 키운 부모로 사회적 위상을 올리겠다든지 하는 생각은 무의식에조차 없다. 내게는 그저 아이가 온전히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 그래서 온전히 삶을 좋아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만이 있다. 


가끔은 아내랑 같이 투덜거리듯이 "우리가 무엇을 위해 이렇게 고생하는 걸까."라고 하기도 하지만, 그 대답은 정해져 있다. 그 무엇을 위해서도 아니다. 그저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존재를 사랑하는 일 그 자체만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저 너를 걱정하고, 너가 잘되었으면 하고, 너가 좋은 사람이 되었으면, 약간 욕심을 부린다면 타인들에게도 기여하는 사람이 되길 바랄 뿐이다. 


자기 자신밖에 모르고, 자기 이익을 위해 모든 논리가 수렴되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만이 지상 과제였던 시절에는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 같은 건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은 뭐랄까, 약간 어리석은 희생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막상 이 사랑의 세계에 진입하고 보면, 자기 자신만을 사랑했던 내가 오히려 더 왜소해 보인다. 이곳은 마치 다른 우주처럼 가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영토였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 있다. 


작은 아이의 손을 잡고, 공룡인지 포켓몬인지에 대해 재잘거리며 나를 따라오는데, "응, 맞아. 이상해꽃이 더 세지." 같은 대답을 하며 나무 위로 노을지는 하늘을 보며 걷는 순간이면, 그렇구나, 이게 삶이구나, 삶은 이러라고 있는 것이구나, 라고 느낄 때가 있다. 아이의 작은 손톱을 깍이고, 잠든 아이의 볼을 만져보고, 작은 두 손으로 쥔 컵에 우유를 따라주고, "아빠, 젤리 먹어도 돼?"라고 묻는 아이의 말에 "너무 많이 먹었잖아, 안돼."라고 대답을 하는 어느 순간에, 삶은 이러라고 있는 것이라는 걸 느끼곤 한다. 


삶은 이러라고 있는 것이었구나. 나 잘난 맛에, 나만의 성공에, 나만의 빛남에, 나만의 쾌락과 즐거움에, 나만의 주목받음에 온 인생 다 바쳐 빠져들고 그것만을 향유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그저 온전히 사랑하는 순간을 경험하라고 있는 것이었구나. 그 사랑을 위해 애쓰는 경험을, 논리나 다른 말로 더 이상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한 그 경험을 해보라고 있는 것이었구나. 그러고 나서, 사랑할 만큼 사랑했다 싶으면 떠나보내라고 있는 것이었구나. 그렇게 살아내고, 사랑하고, 떠나라고 있는 것이었구나, 라는 걸 깨닫는 때가 있다. 


물론, 삶이라는 건 하염없이 너를 사랑할 때도 있고, 나를 위해 애쓸 때도 있는 나날들이 고루 퍼져 있다. 그러나 내게 나이가 들수록 조금씩 더 커져가는 부분은 너를 위한 자리인 듯하다. 종종 나는 아이를 키우는 걸 넘어 세상의 다른 누군가에게 기여하는 일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누군가의 삶에 좋은 영향을 주고 그가 더 나은 삶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보람에 관해서도 이해한다. 거기에야말로 삶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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