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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우 Apr 05. 2023

사랑은 언제나 정지와 관련되어 있다

Unsplash의Arno Smit


사랑은 언제나 정지와 관련되어 있다. 사랑이란, 대개 '멈추는 힘'으로 정의된다. 외로움에 강박적으로 술을 마시거나, 일 중독에 빠지고, 더 큰 성공만을 향한 갈증에 시다릴 때, 사랑은 바로 그런 강박과 중독, 갈증을 정지시킨다. 그리고 당신이 굳이 그렇게 무언가를 쫓지 않더라도, 그냥 여기에 있으면 된다고 알려준다. 손을 잡고 벚꽃 아래를 걷는 오늘이 도착지라는 것을, 나머지 것들이 정지한 지금 여기에 있으면 된다는 것을 가르친다. 


벚꽃은 어느 날 아침, 갑작스럽게 와버린다. 벚꽃이 오면, 무언가 올 게 왔구나, 라는 걸 느끼게 된다. 이제 차가운 겨울은 확실히 지나갔고, 엉거주춤 오던 봄이 확실히 왔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왔다고 생각하기 무섭게 꽃잎들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이 일년의 잠깐, 무언가 확실한 마음으로 다가온 이 봄의 짧은 나날, 그 시간을 누리기 위해 나서는 길은 마치 다른 모든 게 중단된 '충일한 정지(롤랑 바르트)'의 시간 같다. 


요 몇 년간은 벚꽃을 보러 굳이 멀리 나서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저 동네를 많이 걷는다. 그것이 가장 좋다. 바람이 잦아들고, 따뜻한 저녁이 오자, 나는 아내에게 와인을 들고 벤치에 나오자고 했다. 그래서 거의 아무도 없지만, 벚나무가 두어그루쯤 있는 벤치 에 앉아 와인을 마셨다. 물론, 한적한 낭만을 누리기는 어려웠다. 아이가 혼자 놀지 않고 내 손을 잡아 끌며 축구를 하자고 졸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손에는 와인 잔을 들고, 거의 20년 만의 축구를 했다. 벚꽃잎들이 공에 휘감겨 달라 붙었다. 


아이는 같이 축구를 할 만큼 커 있었다. 요즘에는 통 공을 갖고 놀지 않았는데, 막상 공을 꺼내보니 아이는 축구 선수라도 되고 싶은 냥 공을 쫓아 다녔다. 나는 아이에게 처음으로 스포츠랄 것을 가르쳤다. 다음 날에도, 굴러다니는 벚꽃잎들 위로 공을 부지런히 찼다. 거의 20년 만에 하는 축구와 벚꽃과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이 완벽한 날이 너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니까, 나는 잠시 어린 시절을 되찾은 듯한 인생의 정점에 있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인생에서 이 아이의 손을 잡고 벚꽃 아래를 걸을 수 있는 날이, 마치 일 년 중 벚꽃이 피는 시간 만큼 짧다는 걸 알 것 같았다. 


겨울에는 곧 지구가 멸망할 것만 같다. 기후위기도 심화되고 있고, 미세먼지도 나빠지고, 우리가 계절을 누릴 날들도 얼마 안 남은 것만 같다. 그러나 봄이 오면, 그 모든 우려가 거짓말처럼 느껴지고, 얼마든지 세상을 사랑해도 좋을 듯한 마음이 된다. 어느 쪽이 진실인지는 몰라도, 일단 이 봄에서 확실한 사랑을 잠시나마 느낀다. 여름이 다가온다는 상상, 수박과 해변에 대한 생각이 따라온다. 여기에서 나머지 현실을 잠시 잊고, 사랑 속에 정지할 것이다. 


주말이 끝나고, 다시 현실은 돌아오고, 다음 주말쯤 되면 벚꽃은 져있을 것이다. 그래도 벚꽃 구경하고 킥보드를 탄 채 도망간 아이를 잡으러 몇 십분쯤 달려간 이 봄날, 달이 뜰 때까지 벚꽃 아래에서 공을 차던 시간, 아내랑 커피 한 잔을 들고 아이는 밀크쉐이크를 들고 종일 걷던 오후, 아이의 첫 축구를 가르쳐준 이 날의 어떤 심정이랄 것을 잊지는 못할 것이다. 벚꽃이니 봄날이니 다 상투적인 이야기인데, 그런 상투성이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사랑하는 건 이 너무나 평범하고 뻔하기 짝이 없는 상투적인 나날, 그 속에서 잠깐 정지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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