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비교적 젊은 아빠로 사는 것이 좋다. 요즘에는 흔히, 남자 나이 서른둘쯤 아이를 가졌다고 하면, 왜 이렇게 빨리 가졌느냐, 젊을 때는 즐기는 게 좋지 않느냐라는 이야기를 듣곤 한다. 전반적으로 결혼도, 출생도 늦어진 요즘에는 삼십대까지는 최대한 놀 만큼 놀고, 즐길 만큼 즐긴 다음에 천천히 의무를 짊어지는 게 좋다는 인식도 꽤나 퍼져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한 살이라도 더 젊은 감각을 가지고 있을 때, 조금 더 나은 체력과 열의와 에너지를 가지고 있을 때, 나의 사랑을 퍼부울 수 있는 존재와 함께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젊음을 퍼부어 사랑할 수 있는 나날에 아이가 있어서 좋다고 느낀다. 젊은 날을 다 보낸 다음에 느즈막이 아이를 갖는 장점도 있겠으나, 젊음을 쏟아붓는 이 사랑에도 그 나름의 장점이 있다.
사실, 나는 별 준비나 계획 없이 아이가 생긴 편에 가까웠는데, 그 이후의 모든 임기응변의 나날들 속에서 오히려 삶이란, 사랑이란 무엇인지를 더 배워나가는 듯하다. 이런 삶과 사랑을 늦게 알아가는 것도 좋을 수 있지만, 비교적 일찍 알아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어찌 보면, 우리 셋이서 가장 아름다울 수 있는 시절에 마땅히 가장 아름다운 삶을 살기 위해 애써보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상상력, 마음의 힘, 의지력을 되살리는 소생술에 가까이 있다는 느낌이 든다.
사실, 나라면 나이가 좀 더 들어서 아이를 가졌어도 나름 그 삶을 사랑할 이유들을 찾아내긴 했을 것이다. 그게 대개 내 삶의 습관이다. 무엇이든 나의 선택을 사랑하고자 애쓰게 되면, 결국 그 바깥을 모르는 삶에 대한 사랑을 알게 된다. 그러고 나면, 남들이 무어라 하건 나는 내 삶이 최선이라 믿는다. '나는 내 삶이 좋아. 당신이 무어라 하든.' 어찌 보면, 내가 부단히도 이르려고 애쓰는 상태는 항상 그런 상태이다.
그러나 나에게 나이가 더 들어서 아이를 가진다는 것은 선택지에 있을 수 없다. 마치 영화 <어바웃타임>에서처럼, 나이가 더 들어서 가진 아이는 지금 내 곁의 '이 아이'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아이'가 있는 세상 따위에서는 굳이 살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나는 내 젊은 날을 바쳐 사랑하는 이 시절을 온전히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사랑하다보면, 이게 최선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이것이 내게 가장 좋은 삶이었다는 걸 말이다.
나는 내 젊은 날, 아내와 아이랑 셋이서 우리의 동네에 기억을 쌓고, 온 바다를 뒹굴고, 세계를 여행할 것이다. 그 나날들을 달리 그보다 더 가치있고 아름답게 쓸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더 나이가 들어서는, 또 더 가치있게 삶을 쓸 수 있는 방법을 찾을 것이다. 다만, 여기에 나는 젊은 아빠로 살고 있고, 그 삶을 좋아하고 있으며, 내가 아는 한 가장 가치 있게 젊음을 쓰며, 삶을 배우고 있다. 여기에 바깥은 없고, 나는 삶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