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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우 Jun 23. 2023

아이의 뒷모습이 뭉클한 이유


작은 손으로 모래를 집어 들어 열심히 쌓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괜시리 마음이 뭉클해진다. 어른들은 더 이상 아무 관심도 없는 땅바닥의 모래에 몰입하는 것, 그 일에 열심인 것, 그 일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 자체에서 묘한 이질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자신의 등을 내보이고 안심한 채 몰입하는 그 아이의 마음을 어쩐지 알 것 같기도 하다. 


아이는 부모가 어디 갈 리 없다고 믿고서, 그렇게 자기 일에 몰입한다. 사실, 아이가 그토록 모래를 열심히 쌓을 수 있는 건 자기를 보아주고 있을 부모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그러니까 모래를 쌓고 있는 아이의 등을 바라보면서, 나는 매순간 아이의 믿음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 의심의 여지 없는 믿음 앞에서, 나는 괜한 뭉클함 같은 것을 어느 순간 느끼곤 하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한 아이의 세계로 존재한다는 데서 오는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간 제한이 있는 세계, 임시적인 세계로서 이 순간 이 삶에 있다는 바로 그 느낌이 나를 어딘지 아련하게 만드는 것 같기도 하다. 언젠가 아이의 등 뒤, 나라는 세계의 자리는 사라질 것이다. 아이의 등 뒤에는 부모가 아닌 그저 망망대해 같은 세계가 있을 것이다. 


부모의 자리란, 사라질 것이 예정된, 그럼에도 여기 있는 참 기묘한 자리라는 생각이 든다. 다른 어떠한 일에서도, 삶의 이런 일시성 혹은 임시성을 느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아이가 무서운 속도로 크기 때문인지, 나는 이 삶의 덧없음이랄지, 흘러감을 그 어느 때보다 깊이 체험하는 듯하다. 나는 매순간 아이를 떠나보내고 있다. 아이가 스스로 세상을 누빌 수 있는 독립적인 존재가 될 수 있도록 준비시키면서 말이다. 그나마 몇 개월쯤이면 끝나는 고양이 같은 동물의 부모 역할에 비하면, 조금 긴 세월을 부여받은 정도이다.


요즘 아이는 나만 보면 돌진하여 들이받는 '싸우기 놀이'에 심취해 있다. 달리 말하면, '아빠 괴롭히는 재미'로 살고 있다. 마치 다큐멘터리에서 보던 새끼사자 같다. 어릴 적에 내가 아빠한테 이렇게 들이받았던 기억이 없는 걸 보면, 이런 놀이도 얼마 안 남았다는 걸 알 수 있다. 아이 자신도 거의 기억하지 못할 놀이에 내 삶을 쓰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아이가 얼마나 이 놀이를 좋아했는지, 그 때문에 힘들었는지, 그렇지만 그 순간 아이의 웃음 소리와 웃는 표정을 얼마나 좋아했는지를 죽기 전까지도 기억할 것이다.


이상한 말 같지만, 그렇게 아이가 있는 삶은 죽음과 가까워진다. 삶이 짧다는 것, 모든 게 일시적이라는 것, 잠시 머물다 이별하는 일이라는 것을 어느 때보다 깊이 실감한다. 작년에 봤던 아이의 등은 올해 조금 더 넓어졌고 길어졌다. 아이는 가끔 부모가 없는 곳까지도 달려간다. 그러면 나는 아직 떠나지 말라는 듯 한참을 부리나캐 달려 아이를 쫓아간다. 아이를 잡아서는 "이렇게 멀리 도망가면 어떡해!"라고 하면서, 배시시 장난스럽게 웃는 아이를 들어 올린다. 


모래, 갯벌, 튜브, 달리기, 물장구, 싸우기놀이, 놀이터, 이런 것들이 한 시절의 일이다. 이 모든 걸 지나치게 사랑하고 끝내야 한다. 마치 삶처럼 말이다. 지나치게 사랑하고는 놓을 수 없어 아쉬워하게 될 이 삶처럼, 이 시절이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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