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지우 Jul 21. 2023

학생과 교사의 '권리 충돌 제로섬 시소 게임' 문제

최근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오직 '권리 충돌'으로 환원하려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교육 문제를 학생(학부모) 권리와 교사 권리의 대립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과거 학생 인권이 너무 처참했던 나머지 그들의 인권을 과도하게 중시했고, 그 결과 지금은 반대로 교사의 인권이 처참해졌다는 식의 '시소 게임' 형태로 귀결된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를 대립하는 권리의 충돌로 환원하려는 것은 문제 해결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 당연히 학생 인권도, 교사 인권도 소중하다. 양자 중에 더 소중한 게 있을 리 없다. 문제는 어느 쪽의 '권리'가 이기도록 손을 들어주느냐가 아니라, 두 가지 권리가 모두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달리 말해, 시소를 어느 쪽으로 기울여 주는 게 아니라, 기울지 않는 시소를 만드는 게 핵심이다.

학생들이 통제가 안되니 과거처럼 교사들이 학생들을 두들겨 패던 시대로 돌아가길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교사들이 폭행 당하고 악성 민원에 시달리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 세태가 올바르다고 말할 사람도 없을 것이다. 핵심은 명확하고 실체 있는 시스템이 그 가운데에서 아주 정확하고 명료하게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보니,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가 '권리들간의 제로섬 게임'으로 치닫는 것이다.

교육 문제를 놓고 보자면, 이런 문제에서 핵심 시스템은 당연히 교육부나 교육청이 구축해야 한다. 가령, 학교에서 문제 상황이 발생했을 때, 교사가 손쓸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면 곧바로 교육청에 신고하고, 교육청이 신속하게 문제 해결을 위한 프로세스를 밟는 절차가 아주 명확하게 존재하면 된다. 학부모가 교사에게 개인 메시지를 보내는 것도 금지시키고, 전달사항을 전할 수 있는 별도의 통로(어플 등)를 개발하거나, 전 교사에게 업무폰을 별도로 지급하든지 의지를 가지고 체계적인 프로세스를 만들면 된다. 

그러나 지금은 학교 자체를 점점 더 권리들의 전쟁터로 만들어 방치하고서는, 일선에서 학생과 교사가 변호사를 따로 선임하여 서로 싸우지 않으면 어떠한 최종 결론에도 이르지 못하도록, 사실상 시스템이 손 놓고 있는 것이다. 이 권리들 간의 전쟁터에서는 결국 모든 사안이 경찰, 검찰, 법원의 1심, 2심, 3심, 그리고 헌법소원을 거쳐야만 승복할 수 있는 결론이 나게 된다. 학교는 교육 현장이 아니라, 일종의 권리 주체들 간의 전쟁터로 전락하는 것이다. 

이 문제가 과거처럼 학생들을 체벌하는 교권의 추락이 만들어냈다는 식의 '시소적인 발상'으로는 문제 해결에 이르기 어렵다고 본다. 왜냐하면 학생들을 멍이 들도록 두들겨 패고 학부모들로부터 촌지까지 받아가는 정도의 권력이 학생들을 통제할 수 있는 교권이라면, 차라리 학교는 폭파해버리는 게 낫기 때문이다. 

문제는 더 이상 권력과 폭력이 지배할 수 없게 된 사회에 정확하게 진입해 들어와야 할 시스템이 너무나 허술하여 있으나 마나 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교육부가 도저히 시스템을 제대로 구축할 역량이 안된다면, 하다못해 학교마다 사법경찰관을 3명 이상 배치하고, 행정안전부와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것이라도 고려해야 할 수 있다. 나아가 학교마다 여타 시스템과 연계된 심리치료사를 함께 배치하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야만에서 문명으로 간다는 것은, 개개인들이 사적 폭력과 대처에 의존하는 상태에서 벗어나 시스템을 믿고 시스템의 해결에 동의한다는 걸 의미한다. 그런데 믿을 시스템조차 없다면, 그 사회는 야만으로 회귀하고 있다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 야만의 현장이 저잣거리도 아닌 모든 아이들의 인생이 시작되는 '학교'라는 것은 우리 사회의 비극을 상징하는 것과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유튜브와 스케치코미디, 하이퍼리얼리즘의 시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