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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우 Aug 16. 2023

물을 뒤집어 쓰고 놀 수 있는 용기

얼마 전 아이에게 물을 뒤집어쓰고 놀 수 있는 용기에 대해 가르쳐주었다. 아이에게는 다소 소심하고 조심스러운 구석이 있다. 나는 아빠로서 그런 아이의 성향을 조금은 이겨내게 해주는 역할을 해야한다고 믿고 있다. 이를테면, 조금 더 씩씩하고 용기 있게, 내 할아버지가 늘 내게 하던 말씀대로라면 조금 더 ‘용맹한’ 심성을 심어주려고 북돋아줄 때가 있다. 


동네에는 물놀이장이 하나 있는데, 아이는 이곳에서 노는 걸 다소 꺼려했다. 얼마 전, 아내는 아이랑 둘이 이곳에 갔다가 속 터진다며 내게 카카오톡을 보내기도 했다. 친구들은 다 잘 노는데, 아이는 혼자서 물 맞는 게 무서워 한 시간째 놀지도 않고 소심하게 주변을 서성이기만 했다는 것이다. 그래놓고서는, 자신도 잘 놀지 못해서 속상해 울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 날 아이의 손을 잡고 물놀이장에 가서, 같이 물 속에 뛰어들었다. 아이는 역시 소심하게 놀 듯 말 듯 했는데, 나는 아이의 귓가에 속삭였다. “오늘 아빠랑 같이 신나게 놀면, 문방구 가서 장난감 하나 사줄게. 너무 비싼 거 말고.” 아이는 그 말에 혹해서 내 손을 잡고 물놀이터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아이가 좋아하는 ‘포켓몬 역할 놀이’를 함께 했다. 우리는 포켓몬인데, 이 물놀이터에서 사방에서 물을 쏘아대는 거북왕 같은 ‘물 포켓몬’으로부터 도망쳐야 한다는 미션이 주어졌다고 했다. 그렇게 아이랑 쏟아지는 폭포수 속에서 미끄럼틀 밑에 숨고, 기둥을 기어 오르고, 여기저기 온 몸에 흠뻑 젖어가며 한참을 놀았다. 


아내는 아이가 그렇게 노는 게 너무 신기하다면서 놀랐다. 아이도 너무 재밌어 하면서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물장구를 쳤다. 중간에는 혼자 노는 같은 나이대 아이가 있길래, 같이 미끄럼틀 밑에 물을 피해 숨었다가, 내가 물었다. “너도 포켓몬 아니?” “네, 알아요.” “누구 알아?” “피카츄, 파이리, 꼬부기,...” “좋아, 누구 할래?” “어... 피카츄요.” 그렇게 우리는 셋이서 놀기 시작했다.


나는 두 아이를 미끄럼틀 위로 올려주고, 둘이 같이 친구가 되어 놀게 해주었다. 그랬더니 중간부터는 마치 오래 전부터 알던 절친인 것처럼 둘이 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는 내가 빠져도 둘이서 잘 놀기 시작했다. “어떻게 한거야? 신기하네.” 벤치에 돌아와 앉자, 아내가 말했다. 나는 무척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나는 아이랑 함께 온 마음으로 다른 것들을 잊고 신나게 지내는 시간을 기다리곤 한다는 걸, 다시 깨달았다. 한 낮에 그렇게 물을 흠뻑 뒤집어쓰고 나니, 충만감이 들었다. 키즈카페에 데려가주거나, 적당히 레고 놀이를 해주는 것보다, 그렇게 온 마음으로 뛰어노는 게 언제나 나의 마음에도 더 좋다. 적당한 놀아주기는 나의 에너지를 생성하지도 보존하지도 못하고, 소모하기만 한다. 그러나 같이 신나게 놀면, 에너지가 생성되고 마음은 기쁨으로 들어찬다. 


아이가 커나갈수록, 아이랑 노는 방법들도 계속 상상하고 창조해야 한다. 축구를 하든, 달리기를 하든, 이렇게 물놀이를 하든, 매년 아이랑 노는 방법도 달라진다. 과거의 관성에 젖어 있으면, 아이도 나도 재미없는 나날을 보내게 된다. 아이는 물놀이장 마감 시간이 될 때는, 물에 맞는 걸 전혀 무서워하지도 않고, 오히려 재밌어 하며 물을 맞고 다녔다. ‘용맹’해진 것이다.


나는 아이 옷과 내 옷을 챙겨 나갔다고 믿었는데, 아이 하의랑 내 상의만 챙겨갔다. 결국 아이한테 아이 하의랑 내 상의를 입혀줬고, 나는 젖은 채로 돌아왔다. 아내는 역시 나에게 “항상 2프로 부족.”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좋았다. 아이에게 내 옷을 처음 입혀봤는데, 여전히 옷이 너무 커서 롱스커트 같았기 때문이다. 아내는 “이대로 아이도 더 크지 않고, 우리의 시간이 멈추면 좋겠어.”라고 했다. 


나는 이 정도 놀아줬으니 이제 집에 가서 씻고 밥 먹이면 바로 잠들겠구나, 하는 평온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내가 놓친 건, 아이가 어릴 적이랑 다르게 체력도 늘었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놀아줘도 밤 9시가 되어서까지 잠이 안 온다며, 집안을 돌아다니고 놀았다. 정작 나는 아이랑 너무 열심히 놀아줘서 저녁을 먹고 잠시 기절해버렸다. 그렇게 우리는 크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매일을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한 여름 주말에 쫄딱 젖은 채로 동네의 길을 걷는 어른이 되는 법을 배우고, 물놀이를 하다 지쳐 잠드는 일을 배우고 있었다. 그렇게 삶을 사랑하는 연습을 여전히 이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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