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라는 존재는 너무도 신비한 것 같다. 아이 하나가 있어서, 삶에는 대체 불가능한 생기가 생긴다. 어젯밤 아내는, 이 집에 아이가 없다면 얼마나 허전할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도 그 말에 공감했다. 우리가 함께 걷는 길에, 우리가 함께 있는 이 공간에, 우리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아이가 빠져 버린다면, 무척이나 허전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아이는 자신만의 자발적인 생기로 주위를 온통 물들인다. 뭐랄까, 그런 생기있는 존재를 보고 있으면 어딘지 안심이 된다. 피로와 지침, 무기력과 의지박약, 귀찮음과 스트레스와 싸우며 살아가야 하는 어른의 입장에서, 그런 건 모른다는 듯 밝게 웃고, 춤추고, 장난치고, 신나고, 설레기 좋아하는 한 존재가 눈 앞에서 온 세상을 무지개빛으로 물들이고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어딘지 에너지를 받는 느낌이 든다.
우리는 종종 둘이 카페가고, 여행가고, 호텔가는 것이 무엇인지 까먹어 버렸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둘이서 누리는 분위기를 좋아하던 때도 있었는데, 어느덧 그런 분위기는 허전하게 느껴질 만큼, 생기있음을 좋아하게 되었다. 이 생기있음은, 뭐랄까, 분위기 잡고 사진 찍거나 잔잔하게 머물러 있는 데서 오는 행복감이 아니라, 매일을 사랑에 불태우는 듯한 마음을 준다.
나는 아이랑 매일 포켓몬스터 이야기를 하고, 장난을 치고, 놀이터에서 숨바꼭질을 하고, 달리고, 들어서 뱅글뱅글 돌리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웃기고, 그 웃음을 보며 나도 깔깔 웃고, 이 어여쁨에 감탄하며 한 세월을 다 소진시킨다. 내게 하나 뿐인 삶이 주어졌고, 그 삶이 플라스틱 물병에 담겨 있다면, 뚜껑을 따서 머리 위에 쏟아버리듯이 그렇게 삶을 쓴다. 너와 이 시절을 온통 다 소비해버리고, 죽어버리기로 한다.
오늘은 아내와 아이랑 셋이서 비오는 수원 화성의 궁을 걸었다. 죽은 사람들이 살던 이런 곳은, 올 때마다 다소 쓸쓸한 기분이 든다. 결국 다 죽어버렸다고 하는 그들의 삶, 또 그와 다르지 않게 끝나버릴 이 삶이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치 나는 죽지 않을 것처럼, 죽음은 나와 관련 없다는 듯 때로 역사가 된 곳들을 거닐 때면, 사실 역사가 되는 건 모든 인간의 운명이라는 걸 느끼는 순간이 있다. 이 도시와, 문명과, 역사는 사실 거대한 무덤이고, 나도 곧 무덤에 들어갈 운명이다. 후대의 사람들은 또 마치 죽지 않을 것처럼, 내가 죽은 흔적들을 구경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죽음의 공간을 거니는데, 이 끊임없이 자기의 관심을 찾고 호기심을 누리며 여기저기 쏘다니길 좋아하는 한 소년이, 죽음의 분위기를 흩어지게 한다. 이 소년은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생명의 열기를 뿜어낸다. 그것을 보고만 있어도, 어쩐지 안심이 되는 것이다. 그래, 나는 살아 있구나, 아이가 곁에 있는 한 나는 살아 있겠구나, 여기 모든 죽음을 거부하는 생명이 있구나, 하고 느낀다.
아이랑 있어서, 이 시절 나는 조금 더 살아 있다. 어찌보면 삶이란 뻔하고 허망한 것이다. 다들 아둥바둥 살아가지만, 그리 대단한 걸 하는 건 아니다. 그저 일하고, 가끔 여행가고, 맛있는 걸 먹고 살다 떠나는 게 삶이다. 그러나 그 대단치 않은 삶이, 내가 사랑하는 존재가 있어 빛이 난다. 나는 여기 살아 있는 것으로 족하다는 어떤 마음을 느낀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나는 사과나무를 심지 않을 것이다.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나는 아이랑 놀이터에서 숨바꼭질을 하고 포켓몬 놀이를 할 것이다. 그것보다 더 명료한 삶의 증명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