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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우 Sep 27. 2023

"아들, 이리 와서 아빠 안아줘"

"아들, 이리 와서 아빠 안아줘"라는 말에 아이는 웃으며 다가와 내 품에 안겼다. 요즘 들어, 아이는 부쩍 내게 호의적이다. 불과 몇 달 전에만 해도, 아빠는 일종의 '적군' 모드로 보기만 하면 덤비고 투쟁하며 싸우고 노는 상대였는데, 근래 아이의 태도가 제법 바뀌었다. 얼마 전에는 "엄마보다 아빠가 더 좋아.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라는 말에 아내가 적잖이 충격에 빠졌다.

몇 번 반차를 쓰고, 또 주말이면 아이랑 노는 데 온 힘을 다 바치곤 하는 일들이 몇 번 있다 보니, 아이는 아빠랑 노는 게 세상에서 제일 재밌다고 한다.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어 진심을 다해 놀기, 라고 했을 때, 아직 아빠한테 이길 자는 없다. 친구들과 최고의 팀웍으로 놀기에 다섯살은 아직 어리다. 축구를 하든, 술레잡기를 하든, 숨바꼭질을 하든, 역할놀이를 하든, 아빠의 맞춤 서비스가 아직은 제일 자기에게 '딱' 맞게 느껴질 때다. 나는 기꺼이 그렇게 하려고 한다.


축구를 하면, 20점 내기를 하고, 딱 19:20으로 져준다. 숨바꼭질을 하면 한참 못 찾는 척하다가, 아이가 슬슬 들키고 싶을 때쯤 딱 찾아준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 아이 수준에서 아직 짜기 어려운 반전 스토리를 짜서 놀아준다. 달리기 하면, 간발의 차이로 져준다. 술레잡기를 하면, 손가락 끝으로 엉덩이에 닿을 듯 말듯 하며 아슬아슬한 재미를 준다. 까불고 덤비면 혼내준다는 명목으로 들어올려 천장까지 던져준 다음 받아준다.


아이는 이제 한글도 제법 읽고, 말도 곧잘 하고, 여러모로 선하고 여린 심성이라 말도 잘 듣는다. 약속과 협상이 충분히 가능하고, 무엇이든 대가가 있다는 것, 주고 받아야 한다는 것도 잘 납득한다. 키는 벌써 엄마의 가슴 높이까지 닿는다. 또래 친구들 중에서는 제일 크다. 이 폭풍과 같은 성장이, 약간 서럽다. "아들, 이리 와서 아빠 안아줘."라고 할 때, 웃으면서 달려와 내 품에 안기는 존재란, 얼마 남지 않았다. 언젠가 이 공간에 덩그라니 남겨질 것이, 너무 쉽게 상상된다.


아내와 나는 셋의 삶에서 둘의 삶으로 가야할 날을 자주 상상하며, 그때가 되는 것만으로 삶은 많이 저물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곤 한다. 우리의 가장 젊고 아름다운 시절은 여기에 있고, 여기에서 다 쓴 다음에 다음 시절로 갈 예정이다. 이곳에서의 삶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다음 시절의 사랑도 무색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더 늙기 전에, 최대한 더 아이가 되려고, 아이의 눈높이에 있는 존재가 되려 한다. 아이로 살 수 있는 것도 지금이 마지막이다.


아이랑 함께 산다는 건, 삶에서 마지막으로 다시 어린 아이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는, 일생의 마지막 타임머신을 타는 일 같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아니었다면, 내가 다시 공룡 이름과 포켓몬 이름을 외우고, 바다생물들을 사랑하고, 동화책과 그림책을 읽고, 축구와 숨바꼭질을 할 일 따윈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대로 늙어갈 수 있었지만, 다시 빛나는, 노란 어떤 시절을 부여받았다. 그래서 나는 죽기 전 마지막으로, 이 어린 아이의 곁에서, 어린 아이의 키로 달리는 일에 참여하기로 한다. 젖먹던 힘까지 사랑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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