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이 올 때마다, 세월이 얼마나 빠른지를 실감하곤 한다. 조카들은 일년에 한 두 번쯤 보게 되는데, 볼 때마다 전혀 다른 아이들이 되어 있다. 언젠가 처음 봤을 때 세 살 쯤이었던 조카는 어엿한 초등학생이 되어 아이랑 놀아주고 돌봐준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늘어나는 주름,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한결 지친 모습을 매번 다시금 마주한다. 명절은 마치 삶을 건너가는 징검다리 같다.
이번 명절에는, 모처럼 운전을 했다. 하루는 여덟 시간, 하루는 다섯 시간, 또 하루는 여덟 시간, 그런 식으로 운전 또 운전을 하다보니, 피로가 리필해서 담는 유자청처럼 바닥부터 쌓이는 느낌이다. 양가에 드릴 선물을 한 가득 싣고, 중간중간 아이를 위한 민속촌이며, 배 타기며, 해변이며 하는 걸 들르고, 부모님과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손을 잡고, 또 조카들과 아이를 태우고 동물을 구경하러 가고, 그러면서 이 모든 게 '타자'를 위한 일이라는 걸 중간중간 느낀다.
운전도 고생이고, 돈도 많이 쓰고, 나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그 누군가를 위한 이 여정을 밟아 나간다는 게, 어딘지 낯선 느낌도 든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이게 어른이 되는 거구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어릴 적 내가 보던 어른들, 부모를 찾아 뵙고, 과일 바구니와 음식을 싸들고, 양복을 차려입고, 그렇게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그 누군가를 위해서 부지런히 어딘가 가는 듯했던, 그 어른이 나도 되었구나, 생각한다.
인생의 어떤 시절은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 산다. 이를테면, 아이와 조카들을 보면, 이 존재들의 목적과 의무는 그저 많이 웃고 놀고 깔깔거리는 것이다. 도토리를 줍고, 웃으며 달리고, 맛있는 걸 냠냠 먹으면서 잘 자라주는 것이 전부인 시절이 있다. 그러다 또 어느 시절이 오면, 받았던 사랑을 모두 돌려주듯 책임지고 어른으로서 그 의무를 다해야 하는 시절도 있다.
요즘에는 어른 같은 건 가능한 한 되지 않고, 자유롭게 자기만을 위해 살며, 끝까지 어린 왕자 혹은 앤 같은 마음으로 사는 것이 일종의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나름대로 타자에 대한 의무를 감내하기로 하는 삶에서 얻는 명료한 가치에도 대체불가능한 느낌이 있다. 한 번 뿐인 삶에서 마땅히 해야할 일을 다하며 내가 나의 힘으로 여기 서서 타인들에게 책임있는 기여를 행하는 데서 오는, 단단한 마음이 있다.
삶을 사는 방식도, 삶을 정의하는 방식도 다양하겠으나, 나는 내가 책임지는 범위가 곧 삶이라고 점점 더 느끼는 것 같다. 나 혼자 화려하게 꽃 피는 데 도취되는 삶이 최고로 아름답고 자유로운 삶이라 믿었던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때로는 내가 타인들의 꽃을 피우는 대지가 되는, 또 그 누군가의 아픔을 안아주며, 마땅히 나의 힘으로 책임을 다하는 그런 넓고 단단한 대지가 되어가는 삶의 방식이 더 마땅히 살아가는 방식일 수 있다고 믿게 된다. 인류의 많은 어른들이, 어느 마을에서, 어느 부족에서, 어느 성벽 안에서 그러했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