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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우 Sep 14. 2023

집을 어질러 놓는 아이가 있어 다행이다


일 때문에 늦은 밤 집에 들어왔는데, 아이가 어질러놓은 거실의 풍경을 보고, 문득 이런 풍경이 있다는 게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와 아내는 곯아 떨어져 있고, 아이는 자석 블럭을 이어 붙여서 나름대로 집이나 동물 같은 것을 만들어 두었다. 나는 다 치울까 하다가, 아이가 다음 날 자기가 만들어놓은 걸 찾을까 싶어 한 쪽에 모아두었다. 


언젠가 아이는 더 이상 집을 어지르지 않을테고, 집안에 아이의 흔적도 남지 않은 날이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나는 아이가 온 집안에 자신의 흔적을 흘리고 다녔던 때를 그리워할 것 같다. 그저 깔끔하게 잘 정돈된 집에서 느끼는 만족감과, 아이가 어질러놓은 집 안에서 느끼는 묘한 애틋함은 어딘지 차원이 다르다. 전자가 단순한 미감에 가깝다면, 후자는 사랑이고, 그리움이고, 삶이고, 인생의 진리에 대한 슬픔이고, 그저 인간 생명 그 자체의 감정 같다.


혼자, 그리고 아내와 둘이 살다가, 아이랑 함께 살았을 때의 충격이 있었다. 아이가 있는 집은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끊임없이 어질러져 매일 치워야 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혼자 살면, 사실 청소도 자주 할 필요가 없다. 옷가지만 잘 벗어두고, 설거지 정도만 제때 하면 집안이 어질러질 일 자체가 별로 없다. 그러나 아이는 존재 자체로 끊임없이 집 안을 엉망으로 만들기 때문에, 매일 치워야 하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럴 때도, 우리는 이렇게 집안이 엉망이 되는 좌충우돌의 일상조차 그리울 날이 있을 거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힘든 건 힘든 것이고, 그리운 건 그리움이고, 사랑은 사랑이다. 집 안이 텅 비어버린 듯 고요하고, 늘 정돈되어 있고, 활력 보다는 평화가 어울리는 때가 오겠지만, 그 풍경은 벌써부터 다소 쓸쓸하게 느껴진다. 여기에는 매일의 애씀과 힘겨움이 있지만, 그만큼의 생명과 활기와 사랑이 있다. 삶은 원래 고생하는 만큼 얻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침 7시에 나가서 밤 11시에 들어온, 그야말로 가장 바쁜 날 중 하나였지만, 집에 돌아와서는 내일 아이 유치원에 보낼 수저와 물병을 씻고, 아이가 어질러놓은 걸 정돈하고, 잠든 아이와 아내를 바라보고, 이제서야 간신히 쉬는 이 일도, 저주스럽진 않다. 오히려 내가 돌아올 집이 있고, 그곳에 삶을 어지럽히는 사랑이 있고, 내일의 사랑을 위해 애써야 할 약간의 일이 남아 있다는 게, 내게는 삶을 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삶의 근거가 있고, 삶에 발 붙이고 있고, 사랑을 지키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언젠가 늦은 밤 집에 돌아왔는데, 아이가 어질러놓은 블럭 하나 없는 날이 오면, 나는 아마 약간 허탈하게 소파에 앉아 잘 정돈된, 텅 빈 듯한 집안을 다소 허전하게 바라보고 있을 듯하다. 그런 시절은 다시 오지 않겠지, 이제 집 안 여기저기 물어 뜯고 다닐 강아지라도 하나 들여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삶이란 본디 부대껴야 하는 것이다. 거기에 정이 있고, 애씀이 있고, 사랑이 있고, 보람이 있다. 삶은 그런 걸 하려고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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