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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우 Jan 18. 2024

회사에서의 나는 죽었다

문득 얼마 전까지의 회사 생활을 떠올리다가, 회사에서의 나는 '죽었구나' 라는 걸 깨달았다. 회사의 내 자리에 앉아 있던 나는 이제 죽었다. 회사에서의 나는 가족과 있을 때의 나, 북토크나 글쓰기 수업할 때의 나, 다른 친구와 있을 때의 나와도 다른 나였다. 그래서 더 이상 회사에서의 '그런 나'는 세상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고, 다시 돌아올 일도 없게 되었다.


이를테면, 회사에서의 나는 그 나름의 직급이나 회사 내의 관계망에 의해 존재하던 '나'였다. 그 누군가에게 지시를 하거나 지시를 받고, 회사에서 원하던 포지션에서 회사에서 원하던 방식으로 일을 하고, 그 속의 체계에서만 유효한 사람들과 체계 속의 관계를 맺었다. 만약, 회사 밖에서 전 직장 상사를 만나더라도, 이제는 그냥 지나가는 동네 아저씨일 뿐이다. 그 때의 나는 죽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더 이상 글도 쓰지 않고, 독서모임이나 글쓰기 모임도 하지 않는다면, 나는 '작가로서의 나'도 잃게 되는 셈이 될 것이다. 당장 내일부터 나는 '작가 정지우'를 죽일 수 있다. 더 이상 글도 쓰지 않고, 작가로서 활동도 하지 않는다면, 그 자아는 죽어버린다. 대신 내게는 남편이나 아빠로서의 나, 변호사로서의 나, 그 누군가의 친구로서의 나 정도만 남게 될 것이다. 나는 자아를 낳거나 죽이는 존재인 것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엘리스는 이상한 나라에서 만난 동물이 엘리스에게 누구냐고 묻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어제까지의 이야기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 왜냐하면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가 아니거든요." 하림은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에서 이렇게 노래부른다. "니가 알던 나는(나를) 이제 나도 몰라."


오늘 오래 전의 친구를 만났다. 기나긴 회사 생활을 그만두고 그는 음악을 다시 시작하고 있었다. 마치 회사 생활 같은 건 없었다는 듯이, 그는 청춘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때처럼 다시 매일 기타를 연주하고, 작곡을 하면서 자기의 삶을 다시 만들고 있었다. 그는 회사원 시절의 자신을 철저히 죽엿고, 대신 청춘 시절에 싱어송라이터를 꿈꾸던 그 자아를 다시 불러 들였다. 어느 것은 죽였고, 어느 것은 소생시켰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우리는 결국 자기 자신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든, 남들이 보는 그 나를 죽여버릴 수도 있다. 그때부터 새롭게 태어난 나는 당신이 알던 나도 아니고, 당신이 전혀 모르는 나일 수도 있다. 그것은 나쁜 것도 아니고, 이상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 진실이다. 앨리스가 억압받던 생활을 벗어나 '이상한 나라'에서 진짜 자유로운 자기 자신을 찾아가듯 말이다.


삶이란, 아마도 그렇게 자기가 살리고 싶은 자기 자신을 살려나가는 과정일 듯하다. 죽이고 싶은 자신을 죽여가면서, 자기가 살리고 싶은 자기를 집요하게 만들어가는 것이다. 니체가 말했듯, '자기 자신이 되어라'라는 강령은 그런 삭제와 생성의 힘을 스스로 지닐 수 있는 태도를 의미할 것이다. 자유는 때로 우리가 스스로에게 허락하느냐 마느냐의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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