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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기억해야 한다

by 정지우


현재의 관계나 삶이 온전하게 흘러가는지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과거를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서로에 대해 갖고 있던 마음, 내가 이 삶에 대해 꿈꾸던 것들, 내가 살고 싶었던 삶이나 내가 이루고 싶었던 관계 같은 것들이 과연 얼마나 실현되고 있는지를 기억해야 한다. 사람이란, 어느덧 자신도 모르게 삶에 적응해버리곤 하기 때문에, 그렇게 손쉽게 사랑이나 꿈을 잃고, 삶에서 진정으로 바라던 것들을 망각한다.


삶이란 원래 부단히도 달라져가는 것이므로, 과거의 꿈이나 사랑, 마음 같은 것을 잃는 것쯤이야 때로는 별 일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에서, 때로는 서로가 얼마나 서로를 열렬히 사랑했었는지, 어떤 점을 그리도 좋아했었는지, 무엇 때문에 그토록 당신이 사랑스러웠고 어울린다고 느꼈었는지 기억하는 일이란, 당장 오늘 무엇을 했느냐보다 중요할 때도 있다. 적어도 어느 시절 느꼈던 그런 마음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가 되어버리지 않을 만큼, 상대에 대한 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사람은 어느 시절에, 삶의 거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듯이 그 누군가나 무언가를 사랑하고, 그 시절 사랑했던 것만큼 열렬히 그 무엇을 사랑할 수 없는 시절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평생을 그 누군가나 그 무엇을 같은 강도로, 같은 열정으로 사랑할 수는 없다. 오히려 삶이란, 어느 시절, 거의 모든 마음을 쏟아붓듯이 사랑했던 그 마음에 힘입어, 남은 시절에는 그 마음을 계속 기억하고, 다시 그 기억으로부터 수혈을 받고, 그 정점을 찍었던 순간으로부터 마음을 품앗이 받듯이 살아가는 일에 가까울 것이다.


사랑도, 꿈도 어느 시절이 지나면, 관성이 되고, 습관이 된다. 어릴 적, 그토록 열렬히 바랐던 것들이 나중에는 그저 별 대단하지도 않은 일상이 되거나, 일상 바깥으로 밀려나 사라진다. 그런데 그 어릴 적의 마음이랄 것을 어느 날 기억해내고, 내가 얼마나 떠나고 싶었던 여행이랄 것을 다녀왔으며, 내가 얼마나 되고 싶었던 어떤 존재가 되었고, 내가 얼마나 함께하고 싶었던 사람과 함께하고 있으며, 그렇게 내 삶이 한 때는 내가 얼마나 바라던 것의 일부인지를 기억해낸다면, 그것만으로도 삶은 새로운 활기를 띄게 된다. 과거는 지나간 골동품이 아니라, 삶을 계속 새롭게 하는 분수가 되기도 한다.


대개 삶이란, 그저 별 거 아니게 느껴지고, 따분한 일상에 불과하고, 내가 지닌 것들이 당연하게만 느껴진다. 그러나 역시, 지금 나를 이루는 하나하나가 실은 얼마나 간절히 원해서 얻은 것들이고, 그토록 마음을 다하여 열릴히 사랑했던 것들이고, 그렇게 꿈꾸며 쌓아왔던 것들인지를 계속 기억해낸다면, 그 기억의 작업만으로도, 삶은 더 근사한 무엇이 된다. 뭐랄까, 스스로 찍는 영화 속에 들어온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의 삶이 따분한 현실이 아니라, 멋진 영화 한편이라 느낄 수 있는 것은, 삶을 살아내는 가장 훌륭한 기술 중 하나일 것이다. 남들이 볼 때는 별반 다르지도 않고, 알 수도 없고, 남들에게 보여줄 방법조차 없을지라도, 나만큼은 확실히 그 차이를 느낄 수 있는, 그런 확고한 삶의 기술에 속할 것이다. 알고 보면, 과거의 열망을 기억하는 한, 모든 사람의 삶은 한편의 영화이고, 그렇게 느낄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의 능력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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