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노래에 대해 아주 신비로운 체험을 하나 알고 있다. 운전을 하다가 졸릴 때, 잠 깨는 껌이나 시끄러운 음악이나 환기나 그 무엇도 소용이 없을 때, 노래를 부르면 잠이 깬다는 사실이다. 이 효과는 내게 100%나 다름없어서, 졸린다 싶으면 노래를 부른다. 그러면 노래 부르는 동안은 절대로 졸리지 않는다. 아무리 바로 전까지 피곤해서 곯아떨어지기 직전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이전까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는데, 오늘도 차를 타고 가며 노래를 불르며, 문득,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어릴 적, 차를 타면 어머니는 운전하면서 늘 노래를 불러주었다. 나는 그렇게 노래를 불러주는 어머니로부터 무언가를 배웠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단순히 유명한 가수의 노래를 듣는 게 아니라, 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싶은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는 일이다. 적어도 어느 존재 앞에서는, 내가 마음껏 노래불러도 된다는 사실이 아주 마음 깊이, 무의식까지 새겨지지 않았나 싶다.
내가 부르고 싶은 노래를 나의 음율로 부르는 바로 그 순간, 나는 가장 깨어있는 상태가 된다. 평소에는 암기하고 있다고 믿을 수도 없었던 노래의 가사들이 멜로디를 타고 뇌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올라온다. 그 노래 가사들은 평소에는 겨울잠을 자는 다람쥐처럼 땅 속에 웅크리고 있다가, 내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하나씩 눈을 번쩍 뜨고 깨어난다. 드디어 부르는 구나, 우리 모두 뛰쳐 나가자, 세상을 향해 문을 열어 젖히자, 그런 상태가 된다.
나는 어릴 적, 세상에서 어머니가 노래를 제일 잘부르는 사람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조수미 같은 웬만한 가수도 나의 어머니보다 노래를 잘부르진 못한다고 믿었다. 그저 어머니가 운이 없어서 가수가 되지 못했을 뿐이라 생각했다. 실제로 어머니는 노래를 잘했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 믿음은 내게 이런 것이 되었다. 마음껏 노래 불러도 된다, 마음껏 표현해도 된다.
내가 쓴 첫 소설의 첫 독자는 가족이었다. 열다섯 어느 여름, 나는 처음으로 쓴 소설을 뽑아서 먼저 어머니한테, 그리고 여동생과 아버지한테 보여주었다. 여동생은 그 때부터 몇 년간 나의 가장 중요한 독자였다. 나는 소설을 쓰면 모두 여동생에게 먼저 보여주었다. 첫 책인 <청춘인문학>은 청춘이 된 여동생을 위해 쓴다고 생각하며 썼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늘 내게 일정한 사인을 주었다. 표현해도 된다, 표현은 근사한 것이다, 너의 표현은 훌륭하고, 너는 대단한 작가가 될 것이다.
실제로 내가 훌륭하거나 대단한 작가가 되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어쨌든 나는 표현에 거리낌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그 이유는 내 마음 속에 늘 마음껏 노래 불러주던 어머니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나는 아내로부터 종종 '노래를 못한다'라는 구박을 들어가면서도 내 마음껏 노래를 부른다. 세사이 뭐라하든, 내 마음 깊은 곳에는 표현해도 된다는 강렬한 승인이 있다. 나는 아무리 졸려도 글을 써낸다. 하루를 마감하는 가장 피곤한 순간에도, 글을 쓰면 깨어난다. 내가 피곤에 절어 글을 못쓰는 때란 없다. 마치 아무리 졸려도 노래를 부르면 깨어나는 것과 같다.
어쩌면 평소에 나는 반쯤 자면서 살아갈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내 안에 있는 것들을 표현해야 하는 순간에야말로, 나는 깨어나는 것이다. 그게 아이와 함께하는 창의적인 놀이든, 기발한 생각을 따라가는 이벤트든, 글쓰기든, 노래든, 무엇이든 내게는 깨어나는 순간이 있다. 나의 영혼은 그때 내 신체의 모든 호르몬을 물리치고 일어난다. 나중에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올 수는 있어도, 한 번 깨어난 내 영혼을 그 순간 쉽게 잠재울 수는 없다. 나는 그 깨어남을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