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약속을 나간 사이, 우리 집에는 아이의 친구들이 놀러왔다. 아이 친구들의 엄마들은 무척 고마워했는데, 나는 이렇게 집에 아이 친구들을 초대하는 게 참 좋은 일처럼 느껴진다. 말 그대로 그건 '좋은' 일이다. 아이에게 친구를 초대하고 환대하는 법을 가르치고, 아이들이 서로 즐겁게 깔깔대는 걸 보고, 그 아이들의 행복과 즐거움을 위한 한 시절을 마련해줄 수 있다는 건, 아무래도 '나쁜' 일이라곤 볼 수 없다.
어릴 적, 내가 가장 좋아했던 시간도 떠올려보면, 사촌들을 만나 밤까지, 다음 날까지 그렇게 끝도 없이 놀던 시간이었다. 우리는 정말 세상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놀이를 다했다. 그림 그리고, 게임하고, 축구하고, 야구하고, 술레잡기하고, 장난감 놀이 하고, 레고 만들고, 보드게임을 하고, ... 사촌들 만나는 시간이 내게는 천국의 방에 들어서는 일 같았다. 어머니나 이모는 중간중간 맛있는 걸 갖다 주거나 했는데, 나도 아이 친구들을 불러 수박을 잘라주고 먹을 걸 챙겨주었다.
아이가 더 어릴 때는, 친구들이랑 어울리는 것보다는 가족이랑 있는 걸 좋아했다. 다른 친구들도 어렸으니, 친구들끼리 어울린다는 게 마냥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아이는 제법 컸고, 또 초등학교를 갈텐데, 이 시기에 내가 해야할 일은 아이 친구들을 초대하고, 환대하고, 아이랑 친구들을 데리고 산으로 바다로 놀러가고, 그러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는 이 시절을 마땅히 그렇게 보낼 권리가 있다.
생각해보니, 초등학생 때도 방학이면, 어머니와 아버지는 내 친구들을 데리고 나와 함께 계곡 같은 곳을 놀러가곤 했다. 사실, 나는 친구 집에 놀러가거나 친구 나들이에 잘 따라간 기억은 없다. 대신 친구들이 늘 놀러왔고, 친구들과 여행도 갔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런 걸 기꺼이 나를 위해 해주었다. 나도 아이에게 더불어 사는 법을 가르칠 것이다. 친구들을 초대하고 함께하며 살아가는 기쁨을 누리도록 해줄 것이다.
요즘은 유독 이 '초대와 환대'에 관해 많이 생각하고, 또 경험해보게 된다. <그럼에도 육아>를 출간하면서, 아이들을 초대하는 북토크를 기획하고 추진하며 느낀 것도 참으로 많았다. 삶에서, 또 어쩌면 사회에서 필요한 것도 이런 서로에 대한 환대라는 생각을 했던 터였다. 얼마 전, 미국에서 온 사촌을 위해서도 최선을 다해 서울을 구경시켜주고, 집에서 재워주었다. 그래봐야 얻는 이익도 없지만, 그저 그거 충분히 행복하길 바라며, '실컷' 환대해 주었다.
내가 초대를 받을 때도 있다. 이를테면, 김풍 작가 작업실에 놀러가는 식으로 초대를 받고, 그가 '손님'에게 해주는 어떤 환대들에서도 배우는 태도가 있다. 그는 매번 마실 것을 주고, 무언가 선물을 주고, 쓰레기 하나 치우지 말고 돌아가라고 한다. 나는 그게 '초대'구나, 하고 배워서, 아이들이 돌아갈 때는 온 집을 다 어지른 채로 돌아가라고 한다. 손님은 왔다가 행복하게 돌아가면 된다. 아이에게는 우리가 초대했으니 우리가 열심히 정리하자고 한다.
어릴 때, 이 '초대'와 관련하여, 아주 명료한 기억 하나가 있다. 어머니는 손님이 오면, 손님을 침대에 재우고 너는 바닥에서 자는 것이라고 이야기해준 적이 있다. 그렇구나, 나는 그 기억을 거의 평생 기억하고 있다. 손님이 오면, 좋은 방을 주고, 좋은 음식을 대접하고, 즐겁고 행복할 수 있도록 애써주라는 것이었다. 거기에서 나는 무언가를 이해한다. 환대의 기쁨은, 언젠가 다시 그가 나를 환대해주는 것으로 돌려받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 누군가가 베푼 환대에 보답할 때, 서로의 사이에는 '환대의 연대' 혹은 '환대의 믿음'이 생긴다.
한 사회는, 바로 그런 환대의 연쇄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더불어 살도록 만들어졌지, 자기 안에만 무한히 고립되어 살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타인을 초대하고, 또 초대받는 그 삶으로 접어들어야 한다. 내가 요즘 삶에서 느끼는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그것이고, 내가 가장 실천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 또한 바로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