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는 소설이 하나 있다.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복 있는 자들>이다. 이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정말 다행이지 않니? 우리가 임대주택에 당첨될 정도로 가난해서." 청년들 사이에서도 무척 화제라는 이 소설에는, 크게 두 종류의 인물이 나온다. 하나는 자본주의에서의 경쟁과 성실성을 포기한 인물인 희재와, 끝까지 자본주의 안에서의 성실함을 추구하는 류아 언니다.
희재는 가능한 한 최선의 합리성을 발휘하여, 주택급여를 받는 삶을 택한다. 뼈빠지게 월 얼마씩 모아봐야 평생 아파트 사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은 뒤로는, 차라리 아예 '소득'을 줄여서 임대아파트에 사는 것이 훨씬 현명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주택급여를 받기 위해 2인가구 기준 중위소득 43% 이하인 월 176만 원 이하의 소득만 유지하고자 애쓰면서, 20년간 엄마와 임대아파트에 살겠다고 마음먹는 것이다.
반면, 류아 언니도 넉넉한 입장은 아니지만, 남자 친구와 결혼하여 월 100만 원이라도 더 벌기 위해 애쓰려고 한다. 그에 대해 희재는 "그냥 가게 접고 임대주택 신청하라니까?" 하고 일종의 핀잔을 준다. 아주 부자가 될 수 없다면, 자기처럼 아주 가난하게 살아라는 것이다. 가난을 유지하면, 나라에서 아파트도 빌려주고, 수영장도 공짜로 다니게 해주니까, 그보다 합리적인 일이 없다는 것이다.
류아 언니는 일하지 않는 노숙자들을 비난한다. 그렇지만 희재는 일하는 만큼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행운이라 생각한다. 세상에는 하루종일 가게를 열고 일해도 '일하는 만큼 돈을 벌지' 못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희재의 가족이 그랬다. 그들은 같은 세상에 살지만, 완전히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희재는 일해도 의미 없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든 정부 지원금을 받아내며 버티겠다는 것이고, 류아 언니는 어쨌든 하루하루 일하면서 성실하게 삶을 쌓아가겠다는 의지를 지니고 있다.
흥미로운 건 이 소설의 결말인데, 결국 류아 언니가 희재가 소득을 숨기고 있다고 국가에 신고해버린 듯한 것으로 암시되며 끝난다는 점이다. 자본주의에 성실히 복무하는 사람은, 성실하지 않은 이들을 일종의 '기생충'이라 여긴다. 나도 금수저도 아니고, 엄청나게 시간당 높은 보수를 받는 것도 아니지만, 열심히 사는데, 그렇지 않고 세금 타먹으며 사는 이들이 용서되지 않는 것이다. 거기에 깔려 있는 건, 공평함에 대한 의식도 있겠지만, 억울함도 있을 법하다. 나만 일하는 게 억울하다, 왜 쟤네는 놀고 먹으면서 국가의 세금을 뜯어먹는가, 그런 생각에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소설의 또다른 측면의 결말도 흥미롭다. 희재는 임대아파트에 살지만, 임대'동' 앞에는 생태 연못이 있어서, 아이들이 여기에 개구리알을 버리고, 개구들이 시끄럽게 운다. 에어컨을 틀 여유가 없는 희재 가족은 그 때문에 고통받는다. 그러나 관리사무소에서는 창문을 닫고 에어컨을 틀고 있어, 개구리 소리조차 들을 수 없어, 문제라고조차 느끼지 못한다. 폭염이 연일 이어지는 요즘 이 장면이 유독 인상깊게 다가왔다.
사실 이것은 외통수다. 폭염이 이어지는 기후변화 속에서, 대부분 사람은 에어컨 없이 이 더위를 견딜 수 없다. 아파트에 조성한 '생태연못'조차도 일종의 생태친화적인, 기후위기에 대한 묘한 문제의식마저 담고 있다. 우리는 모두 지구를 걱정하고, 기후위기를 생각하며 탄소발자국 하나 줄이려고 노력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에어컨을 양보할 생각은 없다. 정치인을 포함해 정의를 부르짖는 사람들도 정의는 정의지만, 사회를 위하여 내 강남 아파트를 포기한다는 식의 개념은 아예 생각의 범위 밖에 있다. 아무리 사회가 불공평해도, 나의 가족을 위해서건 미래 대비 때문이건 자신의 보수를 자발적으로 반환할 생각은 딱히 아무도 없다. 모두가 '외통수'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 결과는 이미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바 그대로다. 올해 폭염과 폭우가 기록적이라고 하지만, 올해의 이 기후는 남은 인류의 나날 중에 가장 평화로운 기후일 것이다. 향후 5년, 10년 안에 대도시 여름날 온도는 40도를 뛰어넘고, 산호초도 90% 소멸을 향해간다. 폭염, 태풍, 산불, 폭우 등은 올해가 그리울 정도로 터져나갈 것이다. 우리 나라는 불평등으로 인한 인구소멸을 향해가고, 전 세계의 기후 위기로 인한 전쟁, 기후 난민, 불평등도 극심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답은 없어 보인다. 어쨌든 다들 각자 안위를 챙기기조차 더 어려워질 것이고, 누구나 각자 살아남기 위해 애쓰다가 세상 전체는 침몰을 향해간다.
이 소설의 답은 없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주택급여 소득기준을 높이라는 것도 아니다. 가난한 이들을 불쌍히 여기고 기부를 열심히 하라는 것도 아니다. 사회가 불평등하다는 건 보여주지만, 그렇다고 중산층의 위선을 폭로하거나, 권력자와 자본가의 각성을 요청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이 사회에서 모두가 처해 있는 '외통수'의 굴레를 가만히 보여줄 뿐이다. 어떡할 것인가? 각자 삶 속에서 고민할 문제이지만, 뚜렷한 답은 없다. 그 불투명함과 모호함은 우리 사회를 넘어, 인류 전체를 몰락으로 향하게 만드는 가장 명확한 적이었다는 것만이 이제 우리가 알고 있는 전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