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지 당혹스러운 마음을 들게 한 택시 기사님을 만났다. 아이는 아내에게 어릴 적 꿈이 무어냐고 물었다. 아내는 "아나운서가 꿈이었지."하고 말했다. 아이는 아나운서가 무엇이며, 왜 아나운서가 되지 않았는지 물었다. 아내는 그에 대해 나름 조리있게 답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앞에 앉아 있던 택시 기사님이 말했다. "사실, 제가 아나운서 소리를 많이 들었는데 말이죠."
약간 멀미에 시달리고 있던 나는, 무슨 얘긴가 싶어서 귀를 기울여보았다. "제가 젊었을 땐 말이죠, 목소리가 좋아서, 아나운서 같다고 사람들이 그랬지요. 그래서 저도 여기저기 다니면서 아나운서 흉내도 많이 냈단 말이죠. 어디 한 번 들려 드릴까요?" 원래 리액션이 좋은 아내는 기사님에게 들려달라며 부산을 떨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기사님은 "이봉주가 마포대교를 달리고 있습니다.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지나가는 시민들이 물을 주고 있습니다. 아 저러면 안되는데요..." 하면서 한참동안 그 옛날 어느 풍경을 바라보듯, 생중계를 이어갔다.
아내와 아이는 물개 박수를 치고, 기사님은 계속 공연을 이어갔다. "아,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이 만났습니다. 다들 환호하면서 즐거워하고 있네요. 이러다가 통일이라도 되어버리는 거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식으로, 기사님은 몇 개의 상황극을 하더니, "이게 다 제가 생각해서 해낸 겁니다. 이제는 늙어서 이빨도 빠지고 발음도 새지만. 하하." 아내는 그래도 목소리가 멋지시다며 역시 리액션 여왕 같은 면모를 이어갔다. 나는 여전히 반쯤 멀미하는 채로, 창에 비스듬히 기대어, 물끄러미 그 광경을 보았다. 왠지 모르게, 약간의 헛웃음이 나왔다.
차에서 내려, 아내는 "정말 신기한 기사님을 만났지?"라며 약간 신나 있었다. 아이도 덩달아 들떠서 아나운서 흉내를 약간 따라하기도 했다. 나도 재밌었다고 답했지만, 속으로는 가만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젊은 날의 자랑이 있다. 그것이 스포츠 스타나 연예인, 아이돌 스타처럼 모두의 찬사를 받으며 빛나는 종류의 것이 아닐지라도, 저마다 사람에게는 그 사람을 그 사람이게 하는, 그만의 자랑이 있다. 그런 두서없는 생각을 잠시 하고 있었다.
그 길은 부산으로 가는 길이었다. 설에 못 간 고향을 방문하는 여정이었다.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며 어머니를 생각했다. 어머니는 그림을 잘 그렸다. 노래도 잘 불렀다. 우리에게 어머니는 최고의 스타였고, 연예인이었다. 아버지는 말을 잘했고, 친화력이 좋았다. 가족여행으로 섬에 갔을 때, 아버지는 어부들과 금방 친해져서 우리는 최고의 대접을 받았다. 다음 날 아침, 어부들을 따라 낚시배를 타고 나가 동굴을 구경하고, 고기 잡는 걸 구경했다. 그것들이 우리에겐 자랑이었다. 젊은 날의, 우리가 기억하는 자랑.
아마 세상은 온 세상 사람들이 추켜세우는 거대한 찬사와 자랑들로 굴러가겠지만, 사실 삶은 우리들만이 아는 작은 자랑들로 이어진다. 장인어른은 젊은 날 두뇌가 명석했다고 한다. 아내 말에 따르면, 장모님은 세상에서 가장 착한 사람이다. 그런 것들은 우리가 아니면 알지 못하는, 우리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렇지만, 나는 삶이란 이 세상에 영원한 기념비를 조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역시 그렇게 내 곁의 사람들에게 살아 있는 동안 남기는 기억들로 지탱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삶이란 응당 그것 뿐이다. 기사님은 아마 누군가에게 최고의 아나운서였을 것이다. 그에게는 우리 아빠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목소리를 가졌다고, 우리를 위해 운전하느라 그랬지 실은 뉴스 앵커보다 더 잘한다고, 라고 믿는 그의 아이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처럼 자신을 보며 웃어주는 사람들에 기대어 자신의 세계를 살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