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짤막하게

꼰대변별법, 책임이 향하는 방향

by 지예강

이전에 기안84가 출연한 TV프로그램이나 유튜브 콘텐츠를 거의 본 적 없어서, 유명하지만 왜 유명한지는 몰랐다. 아니, 대충은 알았는데 그래서 굳이 더 알고 싶지는 않았달까.


그러다 말도 안 되는 차림으로 하루 종일 달리는 그의 영상을 유튜브 클립으로 우연히 보게 되었고, 그때부터 알고리즘이 열일하기 시작했다. 낮이고 밤이고 뛰는 기안84, 혼자 뛰고 같이 뛰는 기안84, 빗속에서 뛰는 기안84, 대청호와 뉴욕과 시즈오카에서 마라톤 뛰는 기안84. 떠먹여 주는 대로 착착 받아먹었다. 더 보여줄 게 없었는지 알고리즘이 다른 종류의 영상으로 슬그머니 날 인도할 즈음, 시뻘건 모래 언덕에서 뛰는(기는) 기안84가 갑자기 등장했다. 사막이며 극지며 최악의 환경에서 뛰는 기안84가 나온다는, 새롭게 편성된 MBC 프로그램이었다. 극한84.


그래서 일요일 밤 본방으로, 놓치면 재방으로 챙겨보게 되었다. 좀 루즈하긴 했지만 재밌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무언가가 괜스레 거슬렸다. 프랑스 메독 마라톤에 참여한 기안84는 개인 인터뷰를 할 때마다 "내가 장인데…"라는 말을 했다. 여기서 '장'은 함께 마라톤에 참여하는 러닝크루의 대장이라는 뜻이다. 내가 사장인데, 내가 부장인데, 내가 반장인데, 내가 가장인데. 그리고 같은 선상에 놓인 듯한 내가 (크루)장인데. … 뭐야, 꼰대인가. 아, 84년생이면 충분히 그럴 때인가.


기안84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나. 만약 회사에 남았다면 어땠을지 떠올려 봤다. 나도 직급이나 직위를 들먹이며 꼰대 상사가 되었을까. 남에게 들들 볶여본 적 있어서 남을 들들 볶아대기 전에 회사를 나온 게 다행이다 싶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기안84는 남을 들들 볶지 않았다. 스스로를 볶았다. "내가 장인데…"의 뒤에 붙는 문장이 여느 꼰대와는 사뭇 달랐음을 이윽고 깨달았다. "내가 장인데. 체면을 지켜야 하는데.", "장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등등. 모두 그 역할에 따르는 책임을 잘 이행하지 못할까 봐 스스로를 타박하고 채찍질하는 말들이었다.


"내가 대장인데 나에게 이러면 안 되지"와 "내가 대장인데 내가 이러면 안 되지"의 차이. 책임의 방향이 나를 향하느냐 남을 향하느냐. 꼰대에 대한 사유와 사려 깊음이 모자라 한 사람을 곡해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회사를 나온 이유를 알겠다. 내가 남의 몫까지 책임을 떠맡기도, 내 몫의 책임을 남에게 떠넘기기도 싫어서였다. 1인분만 겨우 짊어지고 싶어서. 근데 다들 알겠지만, 그것도 솔직히 쉽지 않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물리적 관점에서) 읽는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