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짤막하게

(물리적 관점에서) 읽는 시간

by 지예강

'장편소설 한 권을 하루 만에 읽기'와 '10편이 수록된 단편소설집 한 권을 하루 만에 읽기'는 다른 문제다. 기준이 하루가 아니라 이틀, 일주일이라도 마찬가지다. 1장에서 2장으로 넘어가듯 이 소설에서 다음 소설로 넘어갈 수가 없다. 단편소설을 읽는 일은 눈과 폐의 문제기 때문이다. 한 편을 읽고 나선, 꾹- 메마른 눈을 감고, 후- 잠시 숨 좀 고를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야 페이지를 넘겨 새로운 이야기를 마주할 용기와 각오가 생긴다. 그래서 이동 중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한 편, 점심 먹고 한 편, 잠들기 전에 한 편 … 이렇게 나눠서 읽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면…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에 43편의 단편이 실린 『청소부 매뉴얼』을 읽는 데 약 3주가 걸린 건 어쩔 수가 없었다는 뜻이다. 더구나 한 편 한 편이 뭐랄까, 굳은살 잔뜩 박인 맨주먹으로 잽을 훅훅 날리는 거리의 파이터 같아서 종이 울리면 코너로 물러나 휘청거리는 정신을 다잡아야 했다. 이 책을 읽고자 하는 독자가 있다면 추천하겠다. 절대 재즈가 흐르는 분위기 좋은 카페 테이블 앉아 따뜻한 커피와 달콤한 케이크를 곁들여 이 책을 읽지 마라. 그냥 집 안 푹 꺼진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기름에 튀긴 짠 스낵에 캔맥주를 까는 게 제격이다. 날 것의 이야기. 호오와는 상관없이 이런 종류의 글을 쓰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브런치스토리는 주로 쓰러 오고, 읽는 건 가끔이다. 쓸 때는 데스크톱이나 랩탑을, 읽을 때는 휴대폰을 이용한다. 브런치스토리 앱을 다시 설치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쓰는 일도 게을리 하지만 읽는 일에 수고를 들이지 않는 이유는, 일단 글이 너무 많다. 뭘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 물론 읽으라고 떠먹여 주는 글, 잘 보이는 곳에 진열된 글도 있지만 난 주로 '최신 글' 탭에 들어간다. 방금, 1분 전, 2분 전, 5분 전, … 매 순간 새로운 글이 화수분처럼 만들어지고, 금세 새로운 글에 휩쓸려 사라진다. 무심히 스크롤을 내리다가 제목이 눈에 띄면 톡- 터치한다. 처음 몇 줄을 읽어 보고 흥미롭지 않으면 바로 나간다. 뭔가 글을 숏폼 보듯이 소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민망할 정도로 어떤 글은 너무 정성스럽다. 단어와 문장을 고르는 일에도 고민이 깊었을 텐데, 디자인까지 섬세하게 신경 썼다. 보기 좋은 글이다. 보기 좋은 글이 읽기 좋은 글인 건 아니지만 좀 더 오래 붙들려 있고 싶은 마음은 든다. 그에 비하면 내 글은 그냥 크게 고심하지 않은 단어와 문장의 나열이고, 행색도 변변찮다. 글 발행 역시 친구에게 농담을 내뱉듯이 툭- 쉽게 이루어진다. 소비뿐만 아니라 생산도 간편히 하고 있는 거다. (브런치스토리의 추구미는 이게 아니겠지만, 내 도달가능미가 이 정도 수준이라…) 쓰고 싶은 걸 후다닥 쓰고 무엇을 썼는지 까맣게 잊는다. 그리고 다시 쓴다. 오늘도 그러려고 왔다가, 이제 간다. 저녁 먹기 전까지 책 읽어야지. 루시아 벌린 다음은 커트 보네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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