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디션이 그리 좋지 않은 이유가 구름이 꽉 끼여 무겁게 내려앉은 날씨 때문인지 아니면 마감 다음 날이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모든 굴레와 속박을 벗어던졌으니 하늘을 훨훨 날아오를 정도로 몸과 마음이 가벼워야 마땅한데, 전혀 그렇지 않다. 일이 남긴 여독과 후유증이 가시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
매번 달라서 매번 어렵다. 그런데 이번 프로젝트는 유난스러웠다. 일을 의뢰받고 처음 진행한 킥오프 미팅, 자료를 받고 설명을 들을 때까지만 해도 자신감이 있었다. 선천적인 일머리와 후천적인 잔머리가 시너지를 내면서 머릿속에선 이미 기획안의 골조를 짜고 있었다. A안은 이렇게, B안은 저렇게 하면 되겠군. 타임스톤을 목에 건 닥터 스트레인지가 모든 경우의 수를 탐색해 가장 최선의 미래로 경로를 설정하는 것처럼, 나 역시 떠오르는 페이지들을 잘 골라내 파워포인트 위에 예쁘게 펼쳐 내기만 하면 완벽한 결과물이 도출될 것 같았다. 물론 착각이었다.
착각보다는 자만이 문제였다. 좀 더 겸손했더라면 내가 이 일에 대해 꽤나 '모른다'는 사실을 일찍 깨달았을 테고, 탐구하고 사유하는 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썼겠지. 대충 훑어본 자료, 엉성한 공부, 빈약한 통찰이 빚어낸 아이디어는 금세 실효성을 잃었다. 탱자탱자 놀다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때에 책상 앞에 호기롭게 앉은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 이게 아닌데? 자꾸 빼꼼히 고개를 드는 의문들을 못 본 척하며 꾸역꾸역 A안을 완성했는데 나조차도 설득되지 않은 논리와 구성, 내 눈에도 띄지 않는 카피와 메시지뿐이었다. 밤은 너무 깊었고 눈이 심하게 벌게진 상태라 일단 잠 좀 자려고 꾸물꾸물 이불 속에 들어갔다. 그러나 전혀 멋지지 않은 내 작업물이 맘에 걸린 탓인지 얼마 못 가 새벽에 눈이 번쩍 떠졌다. 다시 책상 앞에 털썩.
몇 번을 다시 봐도 별로. 이제 어떡하지? 시간이 없는데? 30점짜리 A안이라면 150점짜리 B안을 만들어서 평균을 80점에 맞추면 되지 않을까? 그런데 불가능하단 걸 알았다. 지금 상태라면 25점짜리나 겨우 만들 수 있을까. 결국 (마음속으로) 울부짖으며 파일을 삭제하고, 완전히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했다. 수집한 자료들부터 다시 살피는데, 무언가에 쫓기는 마음에 글자들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 그렇게 며칠 동안 먹고 자고 생활하는 모든 루틴이 망가졌고 몸과 정신의 건강을 10포인트쯤 잃었다. 마감기일을 늦춰달라고 읍소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이 고통을 더 길게 끌고 싶지 않은 욕심이 더 커서 스스로를 매질했다. 일해! 쟁기를 끌고 밭을 갈라고! 그렇게 해서 마감일 아침, 드디어 기획안을 완성했다. A안과 B안 모두 …35점 짜리였다. 절망스러웠다.
메일로 던져 놓고 나의 동굴이자 피난처-이불 속에 들어가 벌벌 떨었다. 어떻게 평가할지 반응이 무서웠다. 설마 쌍욕을 하지는 않겠지. 카톡에는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메일로 기획안 보내드렸으니 확인 부탁드립니다. 궁금한 점은 언제든 연락 주세요!"라고 발랄하게 보내 놓고는.
카톡 숫자 1이 언제 사라지는지, 메일 수신확인을 언제 하는지 어플을 연신 들락날락했다. 그러다가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는데, 지켜보기라도 한 듯 마침맞게 답장이 왔다. "안녕하세요. 보내주신 기획안 확인했습니다. 시간 될 때 전화 부탁드립니다."
그때가 스트레스 최고점이었던 것 같다. 그분에게서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문장이었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보내주신 기획안 확인했습니다. 내부 검토 후 회신드리겠습니다."라고 답이 오고, 며칠 후에 "검토 결과 이러이러하고 저러저러한 이유로 A안으로 진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저희 의견은 이러이러하고 저러저러한데 해당 내용 반영해서 본 작업을 진행해 주시기 바랍니다."로 담백하게 이어지는 게 보통이었다. 이렇게 바로 통화하자고 한 경우가 없었다. 못 본 척할까? 전화 꺼 놓을까? 하지만 난 어른이고, 어른은 어떤 상황에도 늠름하게 맞서야 했다.
통화는 짧고 싱거웠다. 그리고 전화를 끊고도 한참을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통화의 목적이 짧은 시간에 좋은 결과물을 낸 나의 공을 치하함에 있었기 때문이다. 자랑이 아니다. '위기 속에서도 최고의 결과물을 창조해 낸 나, 역시 일머리와 잔머리를 갖춘 이 바닥의 프로구나!' 하며 우쭐해하거나 '아싸, 얻어걸렸네!' 하며 안심할 수가 없는 게, 객관성 개나 주고 한껏 너그럽게 채점한다 해도 35점이었기 때문이다. 끙끙거리며 문제를 풀다가 오답을 적어 제출했는데 정답처리가 된 기분이었다. 그럼 이전에 한 번도 이런 칭찬의 말을 듣지 못했던 이유는 뭐지? 내 기준에는 90점이었지만 그들에게는 그럭저럭 쓸만한, 60점짜리 기획안에 불과했었나? 자, 이제 새로운 국면이 펼쳐진다. '보는 눈'이 없는 건 누구인가?
마감이 끝난 후, 그 일은 잠시 잊고 다른 일에 집중했다. 청소하고 빨래하고 장보고 밥 지었다.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며 사람답게 살기 위해 응당 해야 할 일을 해 내는 건 중요하다. 마감이 끝났다는 건 또 다른 마감이 생겼다는 뜻이고, 언제 또 책상을 중심으로 생활권이 망가질지 모른다. 그전에 수선할 곳은 수선하고 정비할 곳은 정비해야 길바닥에 퍼지지 않는다. 아마 다음 숙제는 나에게는 35점, 누군가에는 90점인 그 밑그림에 꼼꼼하게 선을 넣고 색을 더해서 모두에게 80점을 받는, 누구든지 납득 가능할만한 퀄리티의 결과물을 완성시키는 일일 테다. 이전보다 난도가 높다. 그러니까 잘 먹고 잘 자고 얼른 회복하자. 무엇보다 겸손의 자세를 갖추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