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라이스트처치의 키다리 아저씨
혼자서 고독하게 뭔가를 해내는 일은 멋지지만 다른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은 결국 우리를 위로할 것이다.
김연수 『지지 않는다는 말』
붙임성이 좋은 편도 아니고 경우에 따라 제법 낯도 가리는 성격이라, 급하게 길을 묻는 걸 제외하고는 먼저 타인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핵인싸들은 해외여행 한 번 다녀오면 친구가 백 명씩 생긴다지만, 그건 그들의 이야기지 내 이야기는 아니라는 거. 대부분 혼자 걷고, 혼자 밥 먹고, 혼자 보고, 혼자 느끼고, 혼자 잠든다. 그 방식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아니, 가장 만족스럽다.
그렇다고 해도 여행 내내 온전히 외톨이냐 하면 그건 또 아닌데, 먼저 다가오는 쪽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내가 그렇게 친구 먹고 싶을 만큼 호감형 인상이 아닌데도.) 그렇게 내게 선뜻 관심을 가지는 사람을 난 또 거절하지는 못한다. 거절은 무슨. 활짝 마음을 열고 그를 받아들인다. '혼자'의 방식을 즐기는 게 '혼자'의 방식만을 즐긴다는 건 아니라는 거. '함께'의 방식이 주는 즐거움도 기꺼이 소중히 생각한다는 거. 하지만 너무 자주는 말고.
낯선 곳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이다 보니 낯선 경험을 함께 하게 될 때가 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뉴질랜드에 도착한 바로 그날, 크라이스트처치에서 만난 중년의 아저씨다. (중년이 아닐 수도 있고, 아저씨가 아닐 수도 있다. 외국인 나이 가늠하는 게 제일 어렵다.)
공항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곧장 Chathedral Square로 향했다. 도시의 이름에 걸맞은 아름다운 성당과 광장 주위를 도는 트램, 고깔 모양의 조형물과 거대한 체스판. 아트 갤러리에서 William Morris 전시를 관람하고, Worcester St.을 따라 총총. 그러던 중에 누군가가 내게 인사하며 말을 걸어왔다. 2m는 될 법한 큰 키에 학자의 얼굴을 한 남자, Peter였다.
그가 선뜻 나의 일일 가이드가 되겠다고 자청한 이유는 내가 동양인이기 때문이다. 호주에서 태어난 그는 현재(2008년) 뉴질랜드에 거주하는 외국인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지만, 대학에서는 역사를 전공한 데다 특히 동양(그 중에서 인도와 중국과 일본)의 역사에는 여전히 관심이 많다며 자신을 소개했다. 채식주의자에, 일요일마다 산책을 하고, 광적으로 영화와 책을 수집한다는 것도.
완벽한 가이드였다. Canterbury Museum에서는 뉴질랜드의 역사와 마오리족의 생활문화, 이 지역의 생물과 광물, 지역민들의 생활양식에 대해 귀에 쏙쏙 들어오게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뉴질랜드에서 가장 크다는 Botanic Garden에서는 꽃과 나무와 곤충, 계절과 날씨에 대해 풀어 놓았다. 정말 박학다식했다. 사실 자신이 살고 있는 곳(국가가 아닌, 도시나 마을에)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기란 쉽지 않으니까.
Peter가 같이 저녁을 먹자고 하길래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저녁은 내가 대접하고 싶었다. 저녁 먹을 장소는 Peter가 이끄는 대로. 가는 길에 Peter가 잠시 자기의 집에 들르자고 했을 땐, 솔직히 잠깐 미심쩍었다(미심쩍어 해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집 안에는 집주인만 들어갔고, 난 밖에서 기다렸다. 기다렸는데...
한참이 지나도록 나오질 않는 거다. 뉴질랜드의 6월은 겨울이다. 춥다. 해가 지는 때라 기온은 더 떨어지는 중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피곤했다. 그날이 뉴질랜드에 도착한 첫날이라, 비행의 여독이 채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왜 안 나오는 거지? 난 Peter가 그랬던 것처럼 건물 외벽으로 난 계단을 타고 2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살짝 열린 문틈으로 들어갔는데, 와.
집 안은 아비규환이었다. 셀 수 없이 많은 DVD와 비디오테이프와 책이 탑처럼 쌓여 있었고, 그 탑의 숫자 역시 셀 수 없었다. 탑은 건드리면 곧 쓰러질 것 같이 위태위태해서 몸을 최대한 웅크리고 구겨서 미로처럼 난 길을 헤치고 나아가 Peter를 만났다. 무언가를 찾고 있던 Peter는 나를 보자마자 하던 일을 중단하고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같은 박찬욱 감독의 영화 DVD를 꺼내 보여줬다. 그 혼돈 속에서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안다는 게 더 신기했다. 물론 정작 찾아야 할 것은 찾지 못해, 손님을 밖에 오래 세워두긴 했지만.
반면에 물건을 줄여 홀가분해지면 어디든지 바로 갈 수 있다.
사사키 후미오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혼돈은 내 머릿속에서 일어났다. 저녁을 먹기 위해 도착한 곳이 식당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인도 음식을 먹자길래, 난 당연히 인도요리 전문점에 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가 도착한 곳은 뉴질랜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택. 하지만 사실 일반적인 주택은 아니었고, 힌두교 예배당이었다. 마당까지 늘어선 신발들 사이에 나 역시 신발을 벗어놓고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Peter와 헤어졌는데, 성별을 구분해서 자리에 앉아야 했기 때문이다. 정면에는 화려하게 꾸며진 신단이 있었고, 쌍둥이처럼 닮은 두 신상이 서 있었다. 남자들은 오른편에 앉아 신단이 있는 쪽을 바라보고 앉았고, 여자들은 왼편에 앉아 남자들 쪽을 바라보고 앉았다. 모든 신도들은 예배당에 들어가자마자 바닥에 이마를 대고 절하듯이 기도해야 했는데, 어쩌다 보니 나 역시 비슷하게 흉내 내는 중이었다. 뭐, 이 구역의 법이자 규율이자 의식이니까. 그리고 나서야 방석에 양반다리를 하고 편히 앉을 수 있었다. 뉴질랜드에서 왜 난 힌두교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그때는 인도에 가기 전이었기 때문에, 그런 문화가 너무 생경하고 당황스러웠다.
신단 앞에서 몇몇 신도가 악기를 연주하는 중이었다. 멜로디언 정도의 크기인데 오르간 소리가 나는, 이름 모를 건반악기를 연주하는 여자분은 보컬을 겸하기도 했다. 그분이 선창 하면, 자리에 앉아 있던 신도들이 후창 했다. 찬양이 절정에 다다른 뒤 소강상태가 되자, 승려 한 분이 입장하셨다. 그리고 영어로 설교를 하셨는데, 알고 보니 미국인. 설교 후의 문답 시간. 그리고 다시 이어진 찬양. 이번에는 연주와 노래뿐만 아니라 춤까지.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신났다. 어느새 그 자리에 동화가 된 거다. 찬양을 하는 도중, 신도들의 손에서 손으로 양초가 담긴 그릇과 붉은 꽃이 전해졌다. 초를 받으면 촛불에 손을 잠시 가져갔다가 이마에 대어야 했고, 꽃을 받으면 얼굴 가까이 가져가 그 향을 맡아야 했다. 다 새로운 경험이었다.
헌금은 정찰제였다. 5달러. 헌금을 내고, 옆 방에 들어가 스테인리스 쟁반에 준비된 음식을 떠서 아무 데나 자리 잡고 먹는 게 이곳의 룰인 듯. 그때 다시 Peter를 만났고, 다른 신도들 몇몇과 함께 둘러앉아 대화를 나누며 저녁을 먹었다. 맛있었다. 약 1년 후에 인도에 처음 도착한 이후 그곳에 머무르는 8~9개월 동안 한 번도 음식으로 고생을 하거나 배앓이를 한 적이 없었던 까닭은 아마 이때의 긍정적인 첫 경험 덕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당신은 외국 도시를 거니는 미지의 사람입니다. 불시착자인 당신은 거리의 풍경을 다만 꿈 속처럼 느끼고 이해할 겁니다. 모든 것을 빼앗긴 당신은 그냥 한 인간일 뿐이고 눈과 심장일 뿐이고 놀라움일 뿐이고 기쁨 없는 체념일 뿐입니다. 자기 자신을 잃는 것보다 더 서정적인 것은 없습니다.
카렐 차페크 『유성』
Peter의 친절과 호의, 그리고 그 덕에 얻게 된 특별한 경험치에 여전히 감사하지만, 그날은 거기까지만 해도 충분했다. 힌두교 사원을 나오니 이미 밤이었고, 이젠 정말 쉬고 싶었다. 그래서 Peter가 자기 집에서 DVD 한편 보자는 건 사양했다.(한 번 더 미심쩍긴 했다.) Peter는 전화하거나 메일을 보내거나 편지를 쓰라고 전화번호와 이메일과 집 주소 모두를 메모지에 써서 줬고, 그 메모는 아직까지 그때 썼던 일기장 책갈피 사이에 보관 중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한국에 돌아와서 메일을 보냈는데, 답장을 받진 못했던 듯하다.
뉴질랜드 남섬을 한 바퀴 여행하는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보냈다. 1년간의 호주 생활을 끝내고 한국에 돌아가기 직전이라 혼자 정리하고 생각할 시간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긴 했지만, 첫날 Peter를 만난 게 그 고독에 깊이를 더해 준 전야제 역할을 해 준 것 같다. 10년도 전에 단 하루 만난 사람. 크라이스트처치의 키다리 아저씨. 지구 반대편에서 그의 행복을 기도합니다. (힌두교식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