썸은 몰라도 나무는 제법 탑니다
호주 서쪽에 위치한 퍼스에 얼마간 머물렀을 때, 집주인 가족과 함께 1박 2일로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다. 첫째 날은 Bunbury, Busselton, Ngiligi cave(Yallingup), Dunsbrough. 둘째 날은 Pemberton.
Pemberton의 국립공원에는 키 60m의 나무가 있다. 60m의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데에는 고작 1분밖에 걸리지 않겠지만, 60m의 나무를 오르는 데에는 얼마나 걸릴까?
Gloucester Tree는 호주 남서부에 분포한다는 Karri종 나무 중 가장 유명한 것일 텐데 Gloucester National Park에 위치해 있다. 혹여 불이라도 나면 어쩌나 걱정하던 사람들(추측컨대 숲 애호가)에 의해 화재 관측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다 화재 관측은 더 효과적이고 세련된 방식으로 하기로 결정한 건지, 지금은 관광객들의 고소공포증 시험 및 극복용으로 쓰인다. 나무 꼭대기의 전망대까지 오르는 방법은 단 하나, 튼튼한 심장과 적극적인 두손 두발.
나무에 일정한 간격으로 쇠막대기를 꽂았다. 나선형으로 꼭대기까지 이어진 그 쇠막대기가 일종의 계단이자 사다리인 셈이다. 안전장비는 물론 없다. 나도 그렇고, 일행도 그렇고 그냥 구경만 했지, 오를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발을 헛디디는 순간, 비극일 텐데. 아래에서는 정상이 보이지도 않았고, 나무를 오른 사람들은 개미만 해지더니 어느 순간 시야에서 사라졌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건 아니었다. 몇 개월 전엔 스카이다이빙도 했으니까, 뭐. 고소공포라기보다는 실족공포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할 텐데, 미끄러지는 게(+미끄러워서 균형을 잃는 게, +미끄러워서 균형을 잃고 넘어지는 게) 두렵다. 그래서 자전거도, 스케이트도 못 탄다. 경사가 급한 내리막길 앞에서도 주춤하고, 평평한 빙판길 앞에서도 심호흡한다. (내 덩치에 참 안 어울리지만, 그게 나인 걸 어째.)
그런데 갑자기 마음을 바꿨다. 싸구려 고무 밑창 운동화와 근육 부족 다리와 땀샘 폭발하는 손바닥이 주는 걱정과 심란함을 애써 모른 척하고, 이왕 온 김에 올라보자 싶었다. 그리고 마음먹은 것을 즉각 행동으로 옮겼다. ...옮기자마자 후회했다. 긴장감에 아드레날린이 뿜뿜. 땅이 아득히 멀어질수록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거다. 역시나 손에서는 땀이 배어 나와서 몇 번이고 한 손씩 번갈아 가며 옷에 문질러 닦아내야 했다. 그리고 목적지는 왜 이리도 나타나지 않는 거니. 위아래 봬는 게 없는 상태로 나무에 매달려 있으려니, 기분이 묘했다.
어쨌든 정상에 다다랐다. 나무 판때기를 이어 붙여 단출하게 만들어진 전망대. 고요한 사위에는 오로지 숲과 하늘만이 있었다. 그 옛날, 산불을 관측하던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혼자였는지, 주로 어느 방향을 바라봤는지, 오도카니 무슨 생각을 했는지, 시나 노랫말이나 관찰일지를 썼는지, 무섭진 않았는지, 오르는 데 얼마나 걸렸는지, 팔과 다리가 단단해졌는지, 지원과 차출 중 어느 쪽이었는지, 있는 동안 산불을 목격한 적이 있었는지 등등.
예상과는 달리 내려오는 게 훨씬 수월했다. 그렇게 난 나무 탄 경험이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니, 나무의 입장은 생각 못했네. 옆구리에 그렇게 많은 못이 박혀 있는 데다가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릴 텐데, Groucester Tree의 건강은 안녕한 건가? (추측컨대 그 숲 애호가는 나무 애호가는 아닌듯하다. -오로지 사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