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이란 버티는 사람들의 것
네가 좋아하는 것들 중에 직접 하길 원하거나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게 네겐 없었다. 너는 네가 좋아하는 것들의 오로지 향유자가 되길 원할 뿐, 과정의 수고로움을 감내할 만큼 사랑하고 아끼는 일이 네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게 너를 좌절케 했다.
이석원 『언제 들어도 좋은 말』
Input보다 output에 능한 사람이 되길 바랐다. 하나를 입력하면 열을 출력하거나 '제대로 된' 하나를 출력하는 사람. 그런 출력형 인간이 되기 위해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방식으로 지난한 입력의 과정을 거쳤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겪는 먹고사니즘의 딜레마. 회사와 사회에는 유용했을지 몰라도 나 스스로에게는 무용한 결과물들만을 쏟아내고 나니 허무함이 밀려왔다. 무엇보다도 의욕 상실에, 지치고 피곤했다. 사무엘 베케트를 통해 질 들뢰즈가 말했던 '소진'이 아니라, 그냥 피로 누적이 낳은 번아웃. 남미로 떠나기 전에 나의 결심은 '여행을 통해 회복하자. 그리고 감각을 깨우자. 궁극적으로는 뭐라도 만들어 내자.'였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를 거쳐 칠레에 이르기까지 '뭐라도 만들어 냈냐'하면, 아무것도. 백수라는 이름표를 달고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갔지만, '여행자'는 됐어도 '창작자'는 아직. 노트, 펜, 태블릿 PC ... 모든 준비물을 갖추고 있었지만, 정작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다. 그 숱한 날들 중 뭐라도 써보려고 시도한 날은 손에 꼽고, 그중에서 정말 뭐라도 쓴 날은 전혀 없었던 거다.
그런 상태로 Isla de Pascua, 이스터섬에 다다랐다. 섬에 머물던 언젠가, 빛도 없는 새벽길을 달려 Ahu Tongariki에 있는 열다섯 구의 거대한 모아이를 마주한 날이 있었다. 날이 밝기를 기다리며 어둠 속에 잠긴 석상들을 가만히 바라본 그 시간은 숭고함과 아름다움으로 벅차고 충만했다. 그러니 저 경이로운 장면을 남긴 옛사람들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거다. 거대한 바위를 골라내고, 정을 쳐 깎아내고, 먼 곳까지 옮겨놓고, 땅 깊이 박아 굳건히 세워 놓은, 그 모든 과정을 견딘 사람들. 그들이 들인 수고로움. 노동으로 고통스러웠을 육체. 자유와 쾌락과 방종이 거세된 시간. 그러나 모든 것을 기꺼이 감내할 수 있었던 무언가- 그 무언가가 있었을 텐데.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창작자는 여행자가 아니라 정착자라는 것. 몸과 마음이 떠도는 사람이 아니라, 여행지에서 돌아와 머물러야 할 곳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꿈쩍 않는 사람이라는 것. 시간을 순간이 아닌 영원으로 대하는 사람이라는 것. 인내하는 사람이라는 것. 버티는 사람이라는 것.
그런데 여행하는 사람으로서 추측건대, 세상을 많이 보고 경험한 사람은 절대로 교조주의자가 될 수 없다.
이지상 『호찌민과 시클로』
칠레에서 3,500㎞ 떨어진 이스터섬. 그곳 원주민들 대부분은 아마 평생 그 섬 안에 갇혀 있었을 거다. 그들이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었던 것은 한정적이었을 텐데, 꿈꾸고 상상하고 만들어 낸 것은 이토록 위대하고 초월적이다. 그래, 여행하면서 알게 된 것들은 현실적이다. 꿈꾸고 바라던 풍경 앞에 서면, 그 풍경은 상상이 아니라 사실이 되고 만다. 방랑하는 동안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사람들도 분명 있지만, 난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출력형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오히려 여기저기 떠돌면서 주워모은 모든 것을 항아리에 담아 땅 속 깊숙이 묻어 두는 게 맞았다. 그래서 언젠가 '때가 되었다'고 스스로 판단이 섰을 때, 책상 앞에 바르게 앉아서 묵혀둔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 다듬는 거다. 시간을 들여서 꾸준히. 몸과 마음이 요동치더라도 버티면서. 그러다보면 언젠가 뭐라도 만들어지겠지.
광장이 아닌 밀실에서, 세상이 아닌 골방에서 지금도 돌을 깎고 있을 누군가가 있을 텐데. 그의 '버팀'을 응원한다. 나 스스로를 북돋는 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