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풍경으로 그곳을 기억하기
학창 시절 가장 좋아했던 뮤지션은 롤러코스터. 새빨간 커버의 3집 앨범을 가장 즐겨 들었는데, 첫 트랙을 듣자마자 온몸이 찌릿찌릿했던 경험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이 글을 쓴다고 다시 듣고 있는데, 여전히 세련되고 멋지다. 2002년 월드컵도 치르기 전에 발매된 앨범임에도.)
동일 앨범 2번 트랙의 <라디오를 크게 켜고>는 괜스레 마음이 쪼그라들었을 때 듣기 딱 좋다. 저절로 흥얼거리게 되는 후렴구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라디오를 크게 켜고 달려가자
그 음악을 들려줘요 코파카바나 라랄랄라
저 노랫말 속 코파카바나는 어디일까?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코파카바나 해변일까, 아니면 티티카카 호수에 면한 볼리비아의 도시 코파카바나일까. (또 다른 코파카바나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브라질 코파카바나 해변은 썩 인상 깊지 않았지만, 볼리비아의 코파카바나는 달랐다. 그곳을 떠나기 직전, 내 눈 앞에 선물처럼 펼쳐진 황홀한 풍경 때문이었다. 롤러코스터의 첫 트랙처럼, 그 풍경을 목도한 순간 온몸이 찌릿찌릿.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라파스에서 코파카파나로 향한 날이 성금요일(Viernes Santo)이었다. 휴일을 코파카파나에서 보내려는 수많은 사람들. 버스는 종일 매진이라 새벽 5시에 출발하는 것으로 겨우 예매했고, 버스에서 배-배에서 버스로 갈아타는 곳(San Pedro de Tiquina)에서는 명절 서울역 풍경처럼 늘어선 사람들 틈에 섞여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도착한 코파카바나에서는 평점 최하점의 숙소에 묵을 수밖에 없었고.(사실 만족했지만) 내가 머무는 동안 코파카바나의 모든 곳이 와글와글했다. 원래 그런 건지, 성금요일이라서 그런 건진 몰라도.
도착한 첫날은 몸이 안 좋았고(복통), 둘째 날은 마음이 안 좋았는데 - 마음이 안 좋았던 이유는 그곳에서 만난 한국인들 때문이다. 남미에서 만난 한국인들의 대부분은 그러지 않았는데, 왜 그곳의 그분들은 그랬을까.
태양의 섬(Isla del sol) 잉카의 계단 아래에서 첫 번째 부끄러운 한국인을 만났다. 너무 더워서 근처의 슈퍼마켓에 들러 아이스크림 하나를 샀다. 얼른 먹으려고 포장을 뜯고 있는데,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여자분 역시 나와 같은 아이스크림을 고른 거다. 아주머니는 "Quince(15)."라고 값을 얘기했다. 그러자 그 여자분이 버럭 화를 내며 "영어로!"라고 소리치는 거다. 옆에서 정말 당황했다. 스페인어권 나라에 와서 영어로 말하라는 명령을 왜 한국어로 하고 있나. "Fifteen. 십오요." 내가 얼른 대답해줬다. 그분은 15 볼리비아노를 헤아리지 못했고, 그것마저 내가 거들어줘야 했다.
두 번째 부끄러운 한국인은 '코파카바나'란 이름의 식당에서. 타코와 피스코 사워로 저녁을 먹을 때 앞 테이블에 앉아있던 중년의 부부였다. 식사를 다 끝낸 뒤 직원을 불러 계산서를 달라고 하는데, 그 직원이 메뉴를 가져다 준거다. 그러자 그들의 대응은 무례하기 이를 때 없었다. "아니." "얼마냐고." "Bill." "How much." -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가며, 마치 진도를 못 따라잡는 부진아를 대하는 것처럼 직원에게 짜증과 분노를 쏟아내는데, 먹던 음식이 목구멍에서 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티티카카 호수를 바라보며 코파카파나에서 느긋하게 며칠 지내려고 한 계획은 무산되었고, 번잡스러운 풍경과 상황들 속에서 그곳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해야 했다. 다음 목적지는 역시 티티카카 호수에 맞닿아 있는 페루의 도시 푸노. 휴식은 거기서 취하자 싶었다.
다음날 아침 떠날 계획을 세우고, 마지막 밤은 그냥 꼼짝 않고 침대 속에 있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숙소로 돌아와 터덜터덜 방으로 향하다가 문득 뒤를 돌아봤는데, 그때 내 눈 앞에 펼쳐진 풍경- 무엇으로 형용할 수 있으리. 그렇게 많은 색이 한꺼번에 담겨 있는 창공을 본 적이 있었던가. 끝간데없이 펼쳐진 하늘과 호수가 마구 달려와 날 삼켜버릴 것 같은 기분을 느껴본 적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하늘이 까맣게 짙어질 때까지 거기 서서 넋을 놓고 바라봤다. 그 풍경 하나로 코파카바나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다 얻었다 싶었다. 그리고 그 잠깐 동안 위로받았다. 그래, 난 이런 선물을 받을만한 사람이야, 라고.
그 모든 것들은 곧 사라질텐데,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