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딴 곳에서

13. 2007년 11월

남반구에서 타투하기

by 지예강

요즈음 가장 좋아하는 일본 영화감독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이다. 그의 신작 소식이 들리면 한국에서 개봉하기를 기다렸다가 (대개는 독립)영화관으로 달려간다.


일본 영화라고 하면 <링>을 필두로 하는 공포영화 외에는 떠올리기도 힘들었던 내가 대학생이 되어서야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게 만든 감독이 있었으니, 바로 이와이 슌지다. 누구나 그렇듯이 <러브레터>가 첫 만남이었고, <4월 이야기>와 <하나와 앨리스>로 호감을 갖기 시작했으며, <릴리 슈슈의 모든 것>으로 푹 빠졌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 OST는 캠퍼스 생활 시절 내 MP3 플레이어의 플레이리스트에 장기 집권하기도 했다. 화이트 이와이든 블랙 이와이든 가리지 않고 그의 작품을 찾아서 감상했었는데, 타투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꿔 준 영화는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였다.


영화의 대부분은 기억에서 지워졌지만, 영화의 마지막 즈음에 주인공인 소녀가 가슴께에 나비 타투를 하는 모습은 눈에 선하다. 그전까지만 해도 타투는 타투라기보다는 문신이었다. 법과 도덕을 가볍게 무시하고 주먹으로 세상을 제패하려는 무서운 아저씨들이 등이나 팔에 그리는 호랑이나 용 따위. 몸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무언가를 새긴다는 것이 저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구나 싶었다. 소녀의 나비 타투는 그녀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의미하는, 대체할 수 없는 아이덴티티였다.


타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본격적으로 든 것은 유럽 여행을 가서였다. 부다페스트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인 여행자의 왼쪽 팔에 새겨진 (역시) 나비 타투를 본 순간부터. 그 뒤엔 지나가는 사람들의 타투만 자꾸 눈에 들어오더라. 유럽 여행의 동반자였던 친구 역시 나처럼 타투에 마음이 동한 모양이었다. 우리는 함께 타투를 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보무도 당당히 프라하의 구시가지에 위치한 타투샵을 찾았는데 당장 할 수는 없고 가능한 날짜에 예약을 해야 한다는 거다. 그러자 뭔가 김이 새는 느낌이 듦과 동시에, 스멀스멀 고개를 드는 망설임. 너무 충동적인 거 아니야? 결국 포기.


그로부터 약 1년 반 뒤에 (역시 반은 충동적인 기분으로 드디어) 했다. 유럽과는 완전히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나라 호주에서. 케언즈의 나이트 마켓 건너편에 있는 타투샵이었다. 만약 그날도 다른 날에 다시 찾아와야 한다고 했다면 또 포기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1시에 찾아갔더니 3시에 바로 할 수 있다는 거다. 큰 용기나 결심까지는 필요 없었다. 마음에 드는 디자인을 고르고 나서, 케언즈 시내를 돌아다니며 윈도쇼핑하고 커피 한 잔 마시니 금세 3시였다. 왼쪽 날개뼈 쪽에 할 생각이라 입고 있던 티셔츠와 속옷을 벗고 타투이스트가 준 숄로 겨드랑이 아래를 감싸 묶었다. 아프지 않았다. 30분 만에 끝났다. 별 거 아니구나. 타투를 하는 그 순간 보다, 일주일 동안 물 안 닿게 조심하고 약 꼬박꼬박 발라주고 얇게 벗겨진 피부가 가려워도 절대 손대지 않도록 주의하는 게 더 힘들었다.

IMG_0225.JPG 아, 그리고 당분간 술을 못 마신다


타투가 그때 그 영화 속 소녀에게 그랬던 것처럼 내 아이덴티티가 되지는 못하더라도, 지문이나 홍채, 정맥처럼 내 신원을 증명해 줄 수는 있겠지. 타투를 한 걸 후회한 적은 없다. 첫 타투를 한 지 10년을 기념(?)해 두 번째 타투까지 했다. 타투가 터부시 되는 때는 이미 고릿적이고, 요즘은 오히려 흔해지지 않았나?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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