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딴 곳에서

20. 2009년 12월

태국에서 내게 인사한 사람들

by 지예강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의 친절에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모호할 때가 있다. 감사히 받아들이기에는 미심쩍고, 그렇다고 무작정 경계하기에는 무례한 것 같은 때. 물론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는 게 맞고 흉흉한 세상에 조심해서 나쁠 건 하나 없지만, 그러면 또 여행이 너무 팍팍해지는 게 아닌가 싶은 거다. 그리고 난 웬만하면 그런 예상치 못한 호의에도 제법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편이다.



이봐, 주드, 살다 보면 가끔 착한 사람들에게는 근사한 일들이 일어나는 거야. 걱정할 필요 없어, 바람과는 달리 그런 일은 흔치 않으니까. 하지만 그런 일이 생기면, 착한 사람들은 그냥 '감사합니다'하고는 계속 살아가면 되는 거야. 이런 생각도 좀 해주라고. 좋은 일을 한 사람도 그걸로 기쁨을 얻는다고, 좋은 일을 해줬더니 자기는 그럴 자격이 없다거나 그럴 가치가 없다고 구구절절 설명하는 걸 들을 기분이 아니라고 말이야.



한야 야나기하라 『리틀 라이프』



홀로 방콕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전혀 나지 않는 카오산 로드. 저녁엔 근처 선착장 옆 공원에서 무심히 흐르는 짜오쁘라야 강을 바라보며 한참 시간을 죽였다. 그때 웬 청년이 다가와 한국말로 인사를 하는 거다. 그 친구의 이름은 와타나삭(Wattanasak), 한국영화와 드라마에 관심이 많았다. 벤치에 나란히 앉아서 오랫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가 다음 날 아유타야로 떠나는 일정이라고 했더니 불쑥 함께 가도 되겠냐는 거다. 어린 시절 한 번 가보긴 했지만, 다시 찾고 싶었다며. 며칠 아유타야에 머무를 계획이었으니, 첫날 하루 정도는 동행자가 있어도 괜찮겠지 싶었다. 어쨌든 낯선 사람이니 경계심이 들긴 했지만, 중간에 낌새가 이상하거나 불편한 상황이 생기면 헤어지고 혼자 움직이면 되니까.


다음 날 약속한 대로 선착장에 갔는데 와타나삭이 보이지 않는 거다. 약속 시간에 좀 늦은 지라, 혹시 기다리다가 그냥 포기하고 집으로 간 건 아닌가 싶었다. 어쨌든 난 보트를 타고 아유타야행 열차가 출발하는 후아람퐁(Hua Lamphong)역으로 갔다. 기차표 예매하고 화장실에 잠시 들르려는데, 내 앞에 불쑥 나타난 사람. 와타나삭이었다. 알고 보니 이 친구도 약속 시간에 늦어서 날 찾아 부랴부랴 역으로 온 거였다. 그렇게 함께 아유타야로.


기차로 1시간 20분을 달리고, 배로 잠깐 강 하나를 건너니 아유타야에 도착. 와타나삭은 내가 근처 게스트하우스에 숙소를 잡을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뚝뚝을 타고 함께 왓 쁘라시산펫(What Phra Si Sanphet)으로. 체디(Chedi)라는 이름의 첨탑 세 개가 솟아 있는, 아유타야에서 가장 중요한 유적지였다. 그런데 와타나삭은 거기서 그만 헤어지자는 거다. 그늘에 앉아 책을 읽다가 방콕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난 그래도 하루 동안은 함께 움직일 줄 알았는데. 혹시 그 친구가 갑자기(오히려) 내게 경계심이 들었거나, 불편함을 느꼈던 건 아닌지. 뭐, 존중해 줘야지. 그래도 방콕에 돌아오면 꼭 다시 연락하라며 휴대폰 번호를 알려 주더라.


사진 510.jpg


혼자 좀 더 둘러보다가 게스트하우스 쪽으로 걷고 있을 때였다. 쁘라람(Phraram) 호수를 지나쳐 왓 마하 탓(What Maha That)을 가로지르는데, 유적지 아래에 앉아 있던 남자가 내게 인사를 하며 다가오는 거다.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한다는 A(이름을 적진 않겠다.).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운 말씨와 표정이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내가 들고 있던 지도를 달라고 하더니, 아유타야에서 꼭 가봐야 하는 곳이라며 몇 군데를 표시해 주는 거다. 그리고는 그곳들을 자기가 안내해 주고 싶다고 했다. 피곤하기도 하고 시간도 애매해서 거절하려고 했지만, 결국 한 군데만 함께 가보기로 합의(?) 했다. 그러자 A가 멀리 세워진 오토바이를 가리키며 저걸 타고 가면 된다는 거다.


오토바이 쪽으로 걸어가는 도중에 이미 불안과 두려움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막 알게 된 사람의 오토바이를 탄다는 게 괜찮은 건가? 가려던 곳이 아닌, 인적이 드물고 뭔 일 일어날 것 같은 곳으로 데려가면 어떡하지? 소리 질러도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곳이면? 오토바이에서 몸을 날려 굴러 떨어지면 크게 다치겠지? 그런데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날까? 오토바이는 그냥 평범한 운송수단이잖아. 그래도 이건 아니지. 오토바이에 타고 싶지 않으니 걸어가든지, 아니면 마음은 고맙지만 사양하겠다고 해야지.


뭐, 별의별 생각을 하다 보니 오토바이에 다다랐다. 그때 별안간 갑자기 멀리서 오토바이를 탄 다른 사람들이 뿌연 먼지를 날리며 이쪽으로 몰려오는 거다. 숨어 있던 패거리가 있었구나! 공포. 정말 무서웠다. 이렇게 죽는구나 싶었다. 그런데,


그 오토바이맨들은 누런 제복을 입은 경찰이었다. 그들은 A를 둘러싸더니, 자기네들끼리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경찰 한 사람이 날 더러 옆에 잠시 앉아 있으라고 해서 시키는 대로 했는데, 그 잠시가 잠시가 아니었다. 영문도 모른 채 잔디밭에 앉아서 알아듣지도 못하는 대화에 귀 기울이며 한참을, 정말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기다리다 못해 무슨 일인지 물어봤지만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집에 가도 되냐고 물어보자, 그건 안 된단다. 다른 사람들이 더 오고, A가 일하는 병원의 동료라는 사람도 오고, A의 부모님도 왔다. 사람들은 점점 모여서 무리를 이루는데, 난 외따로 떨어져 앉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공포와 두려움은 이미 사라졌고 지루함과 피곤함이 몰려들 때쯤 경찰 한 사람이 다가와 간단한 영어로 상황을 전달해 줬다.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많다, 길에서 만난 사람을 믿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들은 섹스에 미쳐 있다, 혼자 다니는 건 조심해야 한다, 태국 남자가 외국인 여자에게 다가가는 건 수상하다, 누가 나와 A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경찰에 신고했다, A의 신원이 파악되었고 무고하다고 판단했다, 이제 넌 집에 가도 된다. 끝.


그렇게 다시 터덜터덜 게스트하우스로 걸어가는데, 황당하기도 하고 어안이 벙벙하기도 하고 괜스레 소름 끼치기도 하는 거다. 앞으로 조심해야지. 아무나 막 믿고 따라가지 말아야지. 엄마가 유치원생 아이에게 할 법한 말들을 속으로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그래도 연락하겠단 약속은 지키고 싶어서 방콕으로 돌아온 뒤에 와타나삭에게 전화를 했다. 그런데 날 기억하지 못하는 거다.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왜? 내가 누군지 한참 설명하고 나니(왜 설명을 하는지도 모른 채), 그제야 알겠다는 거다. 바로 그때 공중전화의 동전이 똑 떨어지면서 통화도 똑 끊겼다. 다시 전화하진 않았다. 정말 내가 누군지 안 걸까? 와타나삭이 와타나삭이 아니었던 건 아닐까? 아직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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