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딴 곳에서

24. 2016년 3월

와인 경험치 획득

by 지예강

1월엔 뭐든지 잘될 것만 같습니다
총체적 난국은 어제까지였습니다
지난달의 주정은 모두 기화되었습니다

오은 「1년」『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주종을 가리지 않고 술이라면 다 좋아하는 편이지만, 와인은 꽤 늦게 입문한 편이다. 첫 회사 다닐 때 직장 동료 한 명이 와인을 좋아했는데, 마침 회사 건물 1층에 와인샵이 있어서 가끔 구경삼아 따라갔었다. 와인이라고는 레드와인과 화이트와인 밖에 모르는 문외한으로는 말벡이 뭔지 까베르네 쇼비뇽이 뭔지 원산지는 왜 중요하고 포도 수확연도는 왜 확인해야 하며 등급은 어떻게 보는지 하나도 모르겠더라. (지금도 모릅니다.) 그런 위화감에 괜히 '됐다, 안 먹는다. 치아라' 싶은 마음에 피했는지도. (그에 비하면 소주는 얼마나 깔끔한가.)


그랬던 내가 요새는 가끔 와인 한 잔이 필요해서 퇴근길에 한 병씩 사 오곤 한다. (물론 멋없게 한 번에 반 병씩 마셔버리지만.) 주로 사는 건 Casillero del Diablo. 드라이한 레드와인. 뭐, 다른 와인과 비교해 가며 고심해 고른 건 아니고, 그나마 친숙하기 때문에 선택한 거다. 칠레 산티아고에 있을 때 Concha y Toro에 갔던 게 꽤나 기억에 남았었나 보다.



산티아고에서 만난 M과 지하철을 타고 Las Mercedes역에서 81번 버스로 갈아탄 후에야 Concha y Toro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침 딱 1시에 영어 가이드 투어가 있다고 해서 신청했다. Concha y Toro는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규모의 와이너리이자 세계적인 브랜드의 와인을 생산해 내는 곳이라는데, 그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싶었다. 뭐, 매우 넓은 포도밭과 매우 큰 지하 저장고가 인상 깊기는 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포도밭은 재배종에 따라 구획을 나눠놓고 이름표를 달아놨는데, 잘 정돈된 느낌이었다. 가이드 분의 설명을 들으며 포도 열매 몇 개 따 먹기도 하고.


와인 저장고 갔을 때에서야 투어에 흥미가 붙기 시작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 서서 'Casillero del Diablo'라는 글자와 마주한 순간부터였을까. 어둡고 서늘한 지하공간을 가로지르며 반듯하게 진열되어 있는 수많은 오크나무 와인통을 보니, 저것이 내 것이 아님에도 부자가 된 기분. 그리고 벽돌벽과 와인통이 있는 쪽 공간을 활용해 프로젝터 영상을 상영한 것도 꽤 괜찮은 투어 코스였다. Casillero del Diablo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 설명한 영상인데, 재밌었다. (와이너리 주인이 와인 저장고에 악마가 있다고 소문을 퍼뜨려 와인 도둑들을 영원히 쫓아냈다는 그런 얘기. Casillero del Diablo = 악마의 와인 저장고. Concha y Toro의 대표적인 와인 브랜드이다.)


화이트와인 한 종과 레드와인 두 종을 시음하는 걸로 1시간 15분의 투어가 끝났다. 그때 투어비가 12,000페소였으니까 우리나라 돈으로 2만 원쯤. 와인잔을 무료로 주길래, 와인잔에 따라 마실 와인이 필요해서 두어 병 샀다. 그리고 그 와인은 이후 이스터섬에서 깨끗이 비웠다.


이스터섬을 다녀와서의 일정을 고민하던 때에, M이 멘도사에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사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산티아고로 오는 길목에 있는 도시라 왔던 길을 되돌아 가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산티아고까지 버스로 스무 시간이 넘게 걸린다. 멘도사에 갈 거라면 중간에 경유해서 오는 게 훨씬 낫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같은 방에 묵었던 아주머니가 멘도사를 꼭 가보라고 추천했던 게 떠오르기도 했고 달리 더 좋은 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흔쾌히 그러기로 했다. M이 먼저 멘도사로 떠나고 내가 이틀 뒤에 따라갈 예정이었는데, M이 갑자기 마음을 바꿔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날아간 거다. 결국 뜻하지 않게 나 홀로 계획에 없던 멘도사행.


8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멘도사로 가는 야간 버스 안. 코미디 영화를 틀어준 탓에 탑승객들의 낄낄대는 웃음소리에 쉬이 잠들기 힘들었다. 그리고 왜 자꾸 내 몸뚱이는 의자에서 미끄러지는 건지. 잠이 들어도 자꾸 깰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칠레-아르헨티나 출입국 수속에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새벽 2시에 국경에 도착했는데, 4시가 되어서야 떠날 수 있었으니. 추위에 벌벌 떨면서 기다리는 게 너무 힘들었다. 그렇게 잠 한 숨 제대로 못 자고 피곤한 상태로 멘도사에 도착.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예약해둔 호스텔에 문제가 생겨서 또 하염없이 대기. 아침에 도착하는 걸 미리 말하지 않은 내 탓에, 호스텔 측에서는 no-show인 줄 알고 다른 사람에게 내 침대를 줘버린 거다. 그렇게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멘도사의 첫인상은 이상하게도(?) 좋았는데, 그 첫인상이 그 도시에 있었던 3일 내내 계속 이어졌다. 멘도사에 안 갔으면 후회했을 만큼 그곳에서의 시간이 행복했는데,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와이너리 투어의 역할도 톡톡히 했다.


칠레도 와인으로 이름을 날리지만, 아르헨티나도 그에 못지않다. 멘도사는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와인의 고장. 난 도착한 다음 날 와이너리 투어에 참가했다.

20인승 승합차에 투어 참가자들을 꽉꽉 채워서 출발. (나 포함 19명이었다.) 가이드는 매우 활기찬 청년으로, 이름 대신 자기를 Gato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Gato=고양이. 난 그를 Gato라고 부를 수 없었다. 사람을 '냐옹이'라 부르는 것 같아서. ... 그냥 아무 호칭으로도 부르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나 혼자 동양인이었고, 물론 나 혼자 한국인이었다. 그리고 더 공교롭게도 다른 참가자들은 영국, 호주, 미국에서 온, 모국어가 영어인 사람들인 거다. 괜한 소외감. 그런데 왜 가이드는 나에게 "왜 와이너리 투어에 참가했는지" 물어보는가. ... 뭐라 할 말이 없어서 "I love alcohol." 한 마디 했더니, 좌중 폭소.



마이푸(Maipu)라는 이름의 마을에 도착해 처음 방문한 곳은 Cecchin이라는 이름의 오가닉 와이너리. 가이드를 따라(와이너리에서는 Gato가 아닌 해당 와이너리 소속 가이드가 안내를 해줬다.) 포도밭과 제조공장, 저장고를 둘러보면서 와이너리의 역사와 와인제조과정, 제품 특징에 대해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와인을 시음하니 더 맛있는 느낌. 모르지만 알 것 같은 느낌. Concha y Toro에서처럼 화이트와인 한 종과 레드와인 두 종을 맛봤다. 그 뒤 PASRAI S.R.L이라는 올리브 공장에 잠시 들렸다가, 두 번째로 간 와이너리는 Lopez. 여기가 멘도사에서 갔었던 와이너리 중 규모가 가장 크고 체계적이었다. 효율성과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현대적인 방식으로 생산라인을 구축한 듯한 느낌? 여기서는 스파클링 와인 한 종과 레드와인 한 종을 시음했다.



마이푸를 떠나 멘도사 내에 있는 Toneles를 마지막으로 방문했다. 와이너리 전체 공간을 구석구석 세심하게 꾸며 놓아서 '여기서 살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던 곳이다. 화이트와인 한 종과 레드와인 한 종. 그렇게 심청이 젖동냥하듯 와이너리마다 한 잔 두 잔씩 와인을 받아먹고 나니 투어가 끝난 7시쯤에는 알딸딸했다. 몇몇 참가자들은 이미 취했다며 어느 순간부터 시음을 사양하기도 했다. 1/2 데이 투어를 선택하길 잘했다 싶었다. 원데이 투어였으면 만취했을지도.


며칠 뒤 살타에서 Cayafate 투어에 참가했을 때 Yasija Secreta라는 와이너리 한 곳을 더 갔다. 그렇게 칠레와 아르헨티나에 있는 동안에 조금씩 와인의 매력에 빠져들고 있었는데, 그걸 깨닫지 못했던 나. 그때 더 많은 와인을 맛보지 못한 게 지금에서야 애석하다. 밥 먹을 때마다 한 잔씩 할 걸. 하루 세 잔씩 꼭꼭 마실 걸. 볼리비아로 넘어와서부터는 와인보다는 피스코사워나 맥주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는데, 사실 걔네들(?)에게도 아쉬움이. 물론 여행 중 음주는 적당히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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