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빙하의 기억
조금씩 더 깊은 곳으로
조금씩 더 나아가
는 소절이 끝나면, 목소리가 비어버린 자리에 다른 것들이 쌓인다. 소리와 속도와 감정이 차곡차곡 켜켜이. 그러다 절정에 다다른 순간 곡이 끝나면서, 고조되었던 그 모든 것이 격정적으로 무너져 내리는데… 왜 내 가슴도 같이 무너져 내리는지. 짙은의 <빙하>를 들을 때마다 꼭 영화 한 편을 진하게 보고 나온듯한 기분이다.
실제 빙하도 그러하다. 빙하는 조용함+조용함+조용함+…+∞, 조용함을 무한대로 쌓아 만든 듯 완전한 고요 속에 우뚝 서 있는데, 그 단단해 보이는 체구 어딘가- 예를 들면 어깨나 옆구리 쪽이 갑자기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야 마는 거다. 그때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은 굉음이 아닌 것만 같다. 굉음이라면 두 귀를 틀어막고 고개를 돌리고 인상을 찌푸릴 텐데, 이 굉음은 그냥 그 소리와 그 소리의 진동 속에 계속 포함되고 싶을 만큼 묘하게 매혹적이라고나 할까. 귀로 듣고 피부로 느낄 수는 있되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듯. 그래서 빙하 앞에 선 사람들은 다시 어깨나 옆구리 같이 어딘가 연약한 부분이 한 번 더 터져주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걷기+걷기(속도+1)+걷기(속도+2)+…+∞, 절정 또는 절경을 만나기 위해선 절박해야 하는 건지, 빙하를 만나기 위해서는 빙하가 요구하는 만큼의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야 하는 거다. 슬근슬근 산책하듯 가야지 싶던 마음이 기대했던 시간을 훌쩍 넘기고 예상했던 운동에너지를 훨씬 소모했음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조급해지고, 그러면서 자연히 내딛는 발이 잰걸음으로 바뀌고, 그러다 보니 몸이 버겁고 숨이 가빠지며, 괜히 머릿속에선 그냥 돌아갈까 말까 주저앉을까 누워버릴까 고민하게 되는, 그런 순간이 지나고도 한참 후 부지불식간에 -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제자리 걷는 듯 똑같은 풍경(물론 그 풍경도 아름답지만) 속을 헤매는 듯했었으나 - 장막이 걷힌 듯 눈 앞에 딱 나타나는 빙하, 오오 빙하여.
빙하의 기억, 하나. 뉴질랜드 남섬의 마운틴 쿡에 갔을 때. 전날 왕복 두 시간 코스인 Kea point를 다녀와서 어느 정도 몸풀기는 되었다고 믿으며 Hucker Valley Track을 걸었다. 문제는 왕복 네 시간을 쉼 없이 걸어야 되는 것도 아니고, 무방비 상태로 맞이한 겨울산의 추위와 안개도 아니고, 대만인 룸메이트 Viki가 준 바나나 과자와 캔콜라로는 채워지지 않는 공복감도 아니었다. 바로 혼자라는 사실. 좀 더 정확히 얘기하면 외로움, 쓸쓸함, 고독, 산속에 홀로 던져진 현존재로서의 자각이 아니라, 혹여 발생할 수 있는 부정적인 사태에서 스스로를 구할 수 없을 때를 상상하는 두려움. 아침 일찍 숙소를 나와, 초반엔 Kea Point와 동일한 길을 걷다가 갈림길에서 방향을 틀면서 새로운 길로 접어들기 시작, Alpine Memorial을 지나고, 깎아지를듯한 절벽 아래 안갯속에서 내려다 보이던 Mueller Lake도 지나고, 저 멀리 만년설로 하얗게 빛나는 봉우리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자갈길과 흙길과 나무판자를 엮은 길을 번갈아 밟으며 나아가고, 한참을 뚜벅뚜벅. 혼자서 뚜벅뚜벅. 정말 그 누구도 만나지 못했다. 아무도 없었다. 스쳐가는 사람도 앞서가는 사람도 뒤따르는 사람도, 아무도. (그날 입산금지령이라도 내린 건지 궁금했다.) 그러다가 산등성이를 연결하는 흔들다리 앞에 섰을 때 빙하처럼 차갑고 무겁고 거대한 공포가 우뚝 솟는거다. 튼튼하겠지? 혹시 다리가 끊어지기라도 하면 계곡물로 그대로 추락할 테고, 그렇다면 반드시 저 날카로운 바위에 머리가 짓이겨지고 말리라. 그러나 '죽기밖에 더하겠어.'라는 체념인지 용기인지 모를 마음가짐으로 어쨌든 무탈하게 다리를 건넜는데, 그 뒤로도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이런 다리를 몇 차례 더 만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 그리고 되돌아오는 길 어쩔 수 없이 그 다리들을 한 번씩 더 건너야 하는 상황에서도, 또 점심 때쯤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도 그 길 위에서 사람이라고는 오로지 나 하나뿐이었다는 것.
만년설도 하얗고, 계곡의 거센 물살에 실려 내려오는 빙하조각들도 하얗다. 그런데 왜 계곡물도 하얀 건지. 하얀 눈이 녹는다고 그 물이 하얀 건 아니지 않나. 그리고 더 신기한 건, 계곡물속에 반쯤 몸이 잠긴 바위는 또 왜 하얀 건지. 하얀 눈이 녹은 물에 젖는다고 바위가 하얘지는 건 아니지 않나. (딱히 답을 찾아보지 않아서) 여전히 궁금하다.
집배원 마르그레트 아스게르스도티르는 아주 젊었을 때 눈보라를 뚫고 우편물을 전하러 가다가, 눈 위에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었던 이야기를 보내왔다. 그는 눈을 치우던 불도저 덕분에 동사하기 직전에 잠에서 깼다고 했다. 운이 좋게도 눈의 한가운데에 누워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하지만 눈보라 속을 걷다 보면, 계속 걸어가는 일이 너무 피곤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때 마침 '아! 그냥 부드러운 눈 위에 그냥 누워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베카 솔닛 『멀고도 가까운 -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빙하의 기억, 둘.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뒤 페루의 와라즈(Huaraz)에서 만난 파스토루리(Pastoruri) 빙하. 이 빙하를 보기 위해서는 고도를 견디는 힘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힘은 깊게 들이마시고 깊게 내쉬는 숨에서 나온다. 이미 우유니에서 고산병을 제대로 앓았지만, 파스토루리 빙하는 내가 가본 곳 중에서 가장 높은 5,100m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현지 가이드가 아침에 코카차를 나눠준 거구나?) 그리고 여기엔 우유니의 4륜차처럼 터프한 이동수단이 없다. 말을 타거나 걸어야 하는데, 다들 걸으니까 나도 걸을 수밖에. 아, 당연히 오르막길이다. 물론 날씨는 귀가 얼고 코끝이 찡할 정도로 춥다.
빙하까지는 45분. 속도를 내는 것은 무리고 최대한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천천히 걸었다. 그래도 숨이 차고, 손끝이 저릿저릿했다. 고산병은 산소가 부족해서 생기는 증상이니, 최대한 많이 들숨에 산소를 들이마시고, 날숨에 이산화탄소를 내뱉자. 고행하듯 한 발 한 발 내딛다 보니, 그리고 병풍처럼 둘러진 설산들을 헤아리다 보니 어느새 거대한 빙하가 잠긴 드넓은 호수에 다다랐다. 단단히 얼어붙은 어딘가가 뒤틀리고 갈라지면서 쩌억, 쪼개진 것들이 무너지면서 우르릉, 묵직한 조각들이 호수에 풍덩, 그리고 바로 파도가 일어나며 철썩. 목적지에 다다르니 이상하게도 고산병 증상과 피로감은 쏙 사라지고, 내려오는 길은 발걸음이 가볍기까지 하더라. 물론 와라즈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는 반쯤 죽어 있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