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겨울과 봄의 경계를 흐리는 미세먼지여.
지구와 가까워진 태양의 빛과 볕이, 땅에 채 닿기도 전에 농도 짙은 공기에 흐트러지고 만다. 이미 눈은 뻑뻑하고, 눈꺼풀을 암만 깜빡여 봐도 세상 모든 색이 필터를 하나 덧씌운 듯 톤다운.
그나마 한차례 비가 내리면 잠시나마 시야가 트이는 거다. 내 분에 못 이겨 한바탕 울고 나면 짓눌려 있던 숨통이 탁 터지는 것처럼 그렇게. 그리고 눈물이 마르면 얕은 감정의 더께만 흔적처럼 남듯이, 비가 그치고 하늘이 개면 채 쓸려내려가지 못한 미세먼지는 자동차 보닛과 슈퍼마켓 앞 공병과 창틀 바깥쪽에 꾸덕하다.
매일매일 미세먼지 안갯속에서 밥 먹고 잠자고 멍 때리고 하다 보니, 뉴질랜드 남섬의 Tekapo가 떠오른다. 해가 높이 떠서 공기 중의 물기를 다 말려버리기 전까지 Tekapo 호수가 뭉개 뭉개 만들어낸 안갯속에 언제까지나 짙게 파 묻혀 있는 곳. 물론 미세먼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청정 안개다.
Tekapo 호숫가에 위치한 Lake Tekapo YHA의 4인실에 여장을 풀었다. 창은 Tekapo 호수를 담은 액자 같았다. 창을 열어도 되고, 숙소 건물 뒤편으로 잠깐 나가도 된다. 어디에나 호수가 있다. 깊고 잔잔하게. 물론 제일 좋은 방법은 그냥 발길 닿는 대로 걷는 것. 아무것도 챙기지 않고 가볍게 나서자. 아기자기한 집과 가게들의 소담한 풍경, 작은 다리, 그 다리를 건너서 왼쪽으로 틀면 'Church of the Good Shepherd', 장난감 같은 교회당이 있다. 입구로 들어서면 맞은편 벽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 호수의 풍광이 그대로 들어온다. 그리고 창 앞에 놓인 작은 십자가, 그 고매한 모습. 신을 믿지 않는 나도 낡은 장의자에 앉아 기도를 한다.
아침 서늘한 공기에 눈을 뜨자, 이미 밤새 피어오른 안개가 마을 전체를 삼켜버렸다.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고, 어디에나 있던 호수는 온데간데없다. 방향을 잃고 헤매지 않기 위해, 발을 헛디뎌 넘어지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바깥출입을 자제하며 안개가 걷히기만을 기다린다. 그래서 숙소에 그렇게 보드게임 세트와 책들이 많았던 걸까. 하지만 그걸 이용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고, 대부분 소파에 몸을 파묻고 멍 때리며 음악을 듣거나 침대 속에 몸을 웅크린 채 깨자마자 다시 잠에 들거나 할 뿐. 안개는 사람들에게서 그런 것도 가져가 버린 거다. 예를 들면, 부단한 움직임, 바쁨과 서두름, 잡생각, 의무, 계획.
안개가 걷히기 전에 Tekapo를 떠났는데, 그 안개는 종일 날 따라왔다. Mt. Cook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싣고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창밖으로 보이는 것은 안개뿐이었다. 그날은 해가 뜨지 않은 걸까. 안개가 가로막고 있는 (분명히 멋지고 아름다웠을) 그 풍광을 그저 내 맘대로 상상하면서, 이 안개가 내 어지럽고 불안한 마음도 걷어가 버리길 바랐다. 회한의 더께마저 싹 닦아가 버리길.
오늘도 날이 흐리다. 미세먼지 나쁨.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도심 속 번화가의 풍경. 아무것도 걷어가지 못하고 어떤 것도 닦아내지 못하는 이 안갯속에서, 한 차례 다시 비가 내려야지만이 찌꺼기를 남기고 잠시 흩어질 저 오염된 공기 속에서, 다들 무슨 생각을 하며 어디로 급하게 움직이는 것일까? 난 무엇을 주저하며, 자꾸만 뒤로 미뤄버리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