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풍나물을 데치다가 정전이 됐다. 점검 때문에 잠시 전력을 차단한 건가 생각하며, 건져낸 나물을 찬물에 헹구고 물기를 짜고 적당히 썰어서 된장과 참기름과 다진 마늘을 넣어 무쳤다. 볶으려고 꺼내 놓은 감자와 양파는 손질만 한 뒤 작동을 멈춘 냉장고에 넣었다. 오늘 나의 무기력은 '아무것도 못 하겠다'를 넘어서 '아무것도 못 하는 것도 못 하겠다'의 이상한 단계였는데, 그래서 떠밀리듯 겨우 시작한 요리도 못 하게 될 할 상황에 처하자 결국 밖으로 나갈 결심을 했다.
어둠 속에서 샤워를 하고, 충전해 놓은 손풍기로 머리를 대강 말리고, 냉동실에서 녹고 있던 음식물쓰레기와 현관 앞에 쌓인 재활용 쓰레기를 챙겨서 삐져나오듯 탈출. 관리사무소에 정전이냐고 물었더니 아니란다. 결국 방재실 직원 분과 함께 5분 만에 다시 입성. 전기레인지 틈 사이로 물이 새어 들어간 모양이다. 억지로 하니 이 사달. 조치는 금세 끝났다.
바싹 말라 있어야 할 곳이 적셔지면 기능해야 할 것들이 작동을 멈춘다. 왠지 오늘 물에 푹 젖은 것 같더라니. 어제의 내 바람대로 세차게 비나 쏟아질 것이지, 세상은 그저 흐리기만 하고 나 혼자만 우천 시. 아니, 비가 내린다기 보단 바닥에서부터 스며든 물이 스멀스멀 수위를 높인다는 게 맞는 표현일 듯.
우울감은 아니다. 난 낙관적인 쪽은 절대 아니지만, 그렇다고 비관적이지도 않다. 낙관과 비관 어느 쪽에 기울기에는 다소 관조적. 다만 가끔 나를 예민하게 만드는 것들이 있는데, 이를테면 날씨나 호르몬이나 음악이나 상대방의 말과 눈빛이나 수면의 질이나 나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 등등. 그런 것들에 대한 방수 기능이 없는지라, 부지불식간에 마음이 착 가라앉는다. 그러면 아무것도 하기 싫고 아무것도 못 하겠다. 염세적, 회의감, 무력감은 너무 세고, 그보다는 귀찮음, 지루함, 싫증. 무언가를 해야 할 이유를 상쇄시킨 뒤에도 넘쳐나는 더 많은 이유들에 맞서, 제방은 대체 어떻게 쌓는 건가.
씻은 게 아까워서 입성 5분 만에 다시 탈출. 바로 앞 카페에 삐대고 앉아서 난 뭘 했나. 못 견디고 서점으로 건너가서는 난 또 뭘 했나. 결국 나침반 잃고 다시 귀가했다.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그래도 방풍나물 무침 하나로 밥 한 술 떴는데, 어, 세상에, 입에서 사르르 녹네. 밥 먹으면서 오랜만에 마이큐의 'baby rose'를 찾아들었는데, 어, 세상에, 귀에서 사르르 녹네. 이왕 이렇게 된 거 밤에 푹 자고, 내일 쏟아지는 햇빛에 의욕적으로 눈을 뜨면 참 좋겠다.